항목 ID | GC030004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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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元翼 |
영어음역 | Yi Wonik |
이칭/별칭 | 공려(公勵),오리(梧里),문충(文忠)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서울특별시 구로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오계화 |
[정의]
조선 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공려(公勵), 호는 오리(梧里). 태종의 아들 익녕군(益寧君) 이치가 고조할아버지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수원군(秀原君) 이정은(李貞恩)이며, 할아버지는 청기군(靑杞君) 이표(李彪)이고, 아버지는 함천군(咸川君) 이억재(李億載)이다. 어머니는 동래정씨(東萊鄭氏)로 사헌부감찰을 지낸 정치(鄭錙)의 딸이다.
[활동사항]
이원익(李元翼)[1547~1634]은 지금의 경기도 광명시 소하동에 해당하는 경기도 시흥군 서면 소하리에 살았다. 1569년(선조 2) 별시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승문원정자로 벼슬을 시작하여 봉상시직장과 군기시판관을 역임한 뒤 성균관에서 전적(典籍)·직강(直講)·사성(司成)을 역임하였다. 호조·공조·예조에서는 좌랑(佐郞)과 정랑(正郞), 사간원에서는 정언(正言)·헌납(獻納)·사간(司諫), 사헌부(司憲府)에서는 지평(持平)·장령(掌令)·집의(執義), 홍문관(弘文館)에서는 교리(校理)·부응교(副應敎)를 지냈다.
이어 승정원승지와 호조참의(戶曹參議)를 지냈고, 안주목사(安州牧使)를 거쳐 형조참판·사헌부대사헌·호조판서·예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평안도도순찰사로 왕의 피난길을 도왔고, 이듬해 평양을 되찾는 데 공을 세웠다. 1595년(선조 28) 우의정에 올라 제도도체찰사(諸道都體察使)로 영원수부사(領元帥府事)를 겸하여 작전을 총괄하였으며, 변무사(辨誣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608년(선조 41) 영의정에 올라 대동법의 시행에 관여하였으며, 1615년(광해군 7) 폐모론(廢母論)에 반대하여 유배되었다가 1619년(광해군 12) 풀려났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으로 다시 영의정에 올랐는데, 광해군의 처형을 반대하여 유배에 그치게 하였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도체찰사가 되어 세자를 전주로 호종하였다.
[저술 및 작품]
저서로 『오리집(梧里集)』, 『속오리집(續梧里集)』, 『오리일기(梧里日記)』 등이 있다. 작품으로 「고공답주인가(雇貢答主人歌)」가 있다.
[묘소]
묘소는 경기도 광명시 소하동에 있으며, 신도비(神道碑)가 세워져 있다.
[상훈과 추모]
1604년(선조 37)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올랐다. 청백리(淸白吏)에 오르고, 인조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