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0004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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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河友明 |
영어음역 | Ha Umyeong |
이칭/별칭 | 연당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서울특별시 구로구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안홍민 |
[정의]
조선 전기 문신.
[가계]
본관은 진주(晉州). 호는 연당(蓮塘). 할아버지는 판청주목사(判淸州牧使)를 역임한 하자종(河自宗), 아버지는 영의정을 역임한 하연(河演), 어머니는 이존성(李存性)의 딸인 성산이씨이다.
[활동사항]
하우명은 1413년(태종 13) 서울 돈의문(敦義門) 밖에서 영의정을 지낸 하연의 3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세자[문종]의 스승이었던 은고(恩顧)로 1444년(세종 26)에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을 거쳐 1449년(세종 31)에 철원부사(鐵原府使), 1453년(단종 1)에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를 역임하고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이르렀으나, 계유정난(癸酉靖難)이 일어나자 관직을 버리고 향리로 은거하였다. 사헌부감찰 당시 당직 일에 술에 취해 집으로 돌아갔다는 이유로 사헌부에서 탄핵하여 파면을 당한 적도 있었는데, 은거한 후 조선 전기를 대표하는 효자로 추앙받게 되었다.
아버지 하연(河演)이 관직에서 물러나 집에서 가족들과 함께 휴식을 취하면 글 읽기와 해학으로 기쁘게 해드렸다. 아침·저녁으로 음식을 꼭 몸소 맛보고 손수 조리한 것이 아니면 드리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하연이 말년에 치매를 앓았는데, 하우명은 싫은 기색 없이 한결같은 마음으로 아버지를 보살폈다. 아버지가 78세로 돌아가자 상례를 극진히 했고, 조석의 제수를 친히 준비했다. 거상 (居喪)이 끝나자 어머니를 모시고 인천부(仁川府) 소래산(蘇來山)의 묘소[지금의 시흥시 신천동 산12번지] 옆 별장으로 들어갔다.
세조가 두 번이나 도진무절제사(都鎭撫節制使)의 벼슬로 불렀으나 신병을 핑계로 나가지 않았다. 어머니가 노환으로 식음이 감소하자, 지극한 효성으로 어머니를 섬겨 물이나 뭍에서 나는 맛이 있는 것은 무엇이나 갖추지 않은 것이 없었다. 어머니가 꿩의 간과 산새 구이를 좋아하였는데, 직접 수풀 속에 그물을 치고 꿩을 몰아 잡아다가 올렸다고 한다.
1465년 어머니가 76세로 돌아가자 슬퍼하기를 거의 멸성(滅性)하기에 이르렀고, 묘 옆에 영당(影堂)을 지어 기일마다 친히 제수를 갖추었다. 이 영당에 부모님의 모습을 직접 그린 영정(影幀)을 모셔 두고는 생전에 공양하듯이 행동했다고 한다. 하우명의 지극한 정성은 그가 거주한 인천부에서 중앙으로 보고함으로써 알려졌고, 정문(旌門)과 복호(復戶)가 내려졌다.
[학문과 사상]
하우명의 효행은 아버지 하연으로부터 본받아 전수된 것으로 본다. 하연은 영의정으로 바쁜 일정 속에서도 가묘(家廟)에 참배를 하루도 거르지 않았으며, 돌아가신 부친의 초당을 수리하여 평소 쓰시던 기물이나 자리를 조금도 바꾸지 않을 정도의 효자로서 효행이 부친에게서 그 아들 하우명대까지 이어 내려온 것이다. 하우명의 효행은 당시에는 드문 일이라 하여 여러 문헌에 기록되어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효는 유교적 윤리가 강조되는 조선시대에 더없이 중요한 덕목으로 간주되었고, 하우명 집안은 이러한 덕목의 본보기로서 손색이 없는 사례였다.
[저술 및 작품]
그림에도 뛰어났던 하우명은 직접 부모님의 영정을 그렸다고 한다. 현재 전해지고 있지 않지만, 문화재로 지정되어 백산서원(柏山書院) 등에 모셔져 있는 영정은 하우명이 그린 원본을 보고 옮겨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묘소]
과거 구로구 지역이었던 경기도 시흥시 신천동 산 12번지 소래산 중턱 남쪽 기슭에 있다. 한 묘소에 두 개의 봉분을 쌓은 형태로 하우명과 그의 처인 순천박씨의 묘이다. 묘소를 중심으로 앞 중앙에 상석과 향로석이 놓여 있고, 그 앞에 장명등, 좌우에 문신석인 한 쌍이 배치되어 있으며, 각 봉분 앞에 묘표(墓表)가 있다.
한편, 진주하씨 묘역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하우명 효자정각은 맞배지붕에 한식 기와를 얹은 목조 건물이다. 그 안의 정려비(旌閭碑)는 높이 1.27m, 폭 61㎝, 두께 22㎝의 규모이다. 이 비각은 1700년대에 처음 세워진 후, 후대에 내려오면서 수차에 걸쳐 중수를 실시했다. 1988년 5월 31일에 시흥시 향토유적 제11호로 지정되었다.
[상훈과 추모]
1473년(성종 4) 예조(禮曹)에서 하우명의 효성이 순박하고 지극하니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의거하여 정문을 세우고 복호하여 권장하소서”하며 아뢰자 임금이 이를 가상히 여겨 정문을 세우고 호세(戶稅)를 면제해 주어 풍속을 권장토록 하였다. 또, 1483년(성종 14)에 사재감부정(司宰監副正) 안호(安瑚)가 하우명의 효행이 특이함을 천거하였다.
1624년(인조 2) 합천 신천서원(新川書院)에 배향되었다. 하우명 정려비(旌閭碑)의 비문은 부사 최흔(崔昕)이 지었다. 1995년에는 후손들에 의해 1475년(성종 6년) 강희맹이 지은「소래하중추정문기(蘇萊河中樞旌門記)」의 내용을 전각한 비석이 효자정각 앞에 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