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0004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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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安純 |
영어음역 | An Sun |
이칭/별칭 | 현지(顯之),죽계(竹溪),정숙(靖肅)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서울특별시 구로구 |
시대 | 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안홍민 |
[정의]
조선 전기 구로 지역에서 활동한 문신.
[가계]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현지(顯之), 호는 죽계(竹溪). 증조할아버지는 고려조의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를 지낸 안축(安軸)이고, 할아버지는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를 역임한 안종원(安宗源)이며, 아버지는 조선의 개국 공신인 양도공(良度公) 안경공(安景恭)이다. 어머니는 정당문학(政堂文學) 정사도(鄭思道)의 딸이고, 부인은 정당문학 정공권(鄭公權)의 딸이다.
[활동사항]
안순(安純)[1371~1440]은 1380년(우왕 6) 음보(蔭補)로 행랑도감판관(行廊都監判官)에 임명된 후 1383년(우왕 9) 진사시(進士試), 1388년(우왕 14)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고 1389년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390년(공양왕 2) 직학(直學)에 임명되었으며, 조선이 건국된 1392년 사재주부(司宰注簿)에 발탁되었다. 이후 감찰(監察), 좌습유 겸 지제교(左拾遺兼知製敎)를 거쳤다. 1396년(태조 5) 김해판관(金海判官)으로 좌천되기도 하였으나, 1397년 예조좌랑 겸 세자우시직(禮曹佐郞兼世子右侍直)으로 중앙 관리로 복귀하였다.
1398년 여름에 강원도도사가 되었다가, 이해 가을에 사헌잡단(司憲雜端)으로 다시 중앙에 복귀하였다. 1401년(태종 1) 병조정랑(兵曹正郞), 1407년(태종 7) 우부대언(右副代言), 1409년 좌군동지총제(左軍同知摠制)·경상도관찰사, 1411년 좌군총제(左軍摠制)·집현전제학, 1414년 충청도관찰사, 1419년(세종 1) 호조참판으로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뒤 이듬해 공조판서(工曹判書)가 되었다.
1423년(세종 5) 함길도관찰사에 이어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를 역임하였고, 1424년과 1430년(세종 12)에도 진위사(陳慰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후 호조판서와 대제학 등을 지냈고, 1432년과 1432년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와 판호조사(判戶曹事)를 겸하였으며, 1435년(세종 17) 의정부찬성사(議政府贊成事)를 역임하였다. 1437년(세종 19)에는 충청도 지방의 기근을 수습하기 위한 도순문진휼사(都巡問賑恤使)로 활동하면서 그 임무를 잘 수습한 공로로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올랐다. 1439년(세종 21) 은퇴하여 금천(衿川)의 별장에 머무르다 이듬해에 세상을 떠났다.
[저술 및 작품]
안축의 시문집인 『근재집(謹齋集)』 부록에 안순의 유고(遺稿)가 실려 있다.
[묘소]
묘소는 1990년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74호로 지정된 순흥안씨 양도공파 묘군에 있으며, 위치는 서울특별시 금천구 시흥동 산126-1번지이다. 묘역에는 봉분 3기, 신도비(神道碑)[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 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덤 근처 길가에 세우던 비] 3기, 묘비 3기, 문·무관석 8기, 장명등 2기 등이 있다. 순흥안씨 양도공파 묘군에는 안순을 비롯하여 조선 초기 개국 공신인 양도공 안경공, 문숙공(文肅公) 안숭선(安崇善), 소윤공(小尹公) 안숭신(安崇信), 대사헌공(大司憲公) 안숭효(安崇孝)의 묘가 조성되어 있다.
묘는 단분(單墳)이고, 묘표는 옥개형(屋蓋形)이며 2면비이다. 규모는 옥개석 62×42×28.5㎝, 비신(碑身) 52×31.5×83㎝, 비좌(碑座) 63×54㎝이다. 문인석은 공복 차림에 갓을 쓴 ‘복두공복(僕頭公服)’ 차림이다. 표석(表石)과 신도비(神道碑)가 있으며, 비문(碑文)은 변계량(卞季良)이 지었으나 비가 소실되어 후손인 사헌부감찰 안기량(安琦良)이 짓고, 진사(進士) 안긍렬(安肯烈)이 글씨를 썼다. 규모는 비신 96×32×181㎝, 총 높이 280㎝이다.
[상훈과 추모]
안순이 병이 걸렸을 때부터 세종이 연달아 내의(內醫)를 보내어 병세를 묻게 하고, 음식물과 약을 하사하였다. 그의 부음이 들리자 세종은 이를 슬퍼하여 2일간 조회를 정지하게 하고, 치조(致弔)와 치부(致賻)하며, 시호(諡號)를 정숙(靖肅)이라 칭하였다. 몸을 공순(恭順) 히 하고 말이 적은 것이 정(靖)이요, 마음을 잡아 결단함이 숙(肅)이라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