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0004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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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盧嵩 |
영어음역 | No Sung |
이칭/별칭 | 중보(中甫),상촌(桑村),경평(敬平)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서울특별시 구로구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안홍민 |
[정의]
고려 후기와 조선 전기 문신.
[가계]
본관은 광주(光州). 자는 중보(中甫), 호는 상촌(桑村). 숭(崇)은 초명이다. 증조할아버지는 감문위대장군(監門衛大將軍)을 지낸 노서(盧恕)이고, 할아버지는 대호군(大護軍)을 지낸 노단(盧亶)이다. 아버지는 감찰지평을 지낸 노준경(盧俊卿)이며, 어머니는 전주이씨(全州李氏)로 비순위별장(備巡衛別將) 이천로(李天老)의 딸이다.
[활동사항]
노숭(盧嵩)은 1357년(공민왕 6) 진사가 되고, 1365년(공민왕 14) 문과에 급제하여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역임하였다. 공민왕이 승하하고 나이 어린 우왕이 즉위하였으나 놀기만 좋아할 뿐 절제가 없었다. 어느 날 우왕이 신하들과 함께 놀이를 나갔다가 갑자기 내린 소나기로 냇물이 불었을 때 노숭이 왕을 업고 냇물을 건너면서 절제 있는 행동을 해 줄 것을 간청하였다. 1382년(우왕 8)에는 동지밀직겸대사헌(同知密直兼大司憲)이 되었는데, 어느 날 왕이 말을 타고 사냥하다 노숭의 집 앞까지 오게 되어, 주위 사람들에게 누구의 집인가를 묻고 노숭의 집이라고 대답하자, 말이 끝나기 무섭게 집을 빠져 나왔다는 일화도 전한다.
1389년(공양왕 1) 전라도관찰사가 되어 익산과 나주에 각각 득성창(得成倉)과 영산창(榮山倉)을 세우고, 성(城)을 쌓고 조운을 편리하게 하여 당시 왜구의 침략으로 황폐화된 주군(州郡)들을 평안하게 하였다. 또한, 3년 동안 조세를 면제시켜 주도록 조정에 건의했으며, 의창(義倉)이 없는 주군(州郡)에는 이를 설치하도록 하였다.
1395년(태조 4) 개성유후를 거쳐 1397년(태조 6)에는 경기좌도관찰사가 되었다. 이때 경기도 땅에 고관들의 별장이 많았는데, 세금을 공평하게 매기고 청탁을 하지 않아 청렴함을 보였다. 태종이 즉위하자 삼사좌사(三司左使)·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로 발탁되었으나 노모(老母)의 상을 당해 사직하였다. 다음해 상중임에도 불구하고 참판승추부사(參判承樞府事)로 중용되었고, 그 뒤 참찬의정부사를 거쳐 1414년(태종 14) 검교우의정(檢校右議政)에 이르렀다. 죽을 때 아들들에게 불사(佛事)를 쓰지 말도록 유언했다고 전한다.
노숭은 고려 우왕을 섬길 때는 다른 신하들과는 달리 왕에게 놀기 좋아하는 것을 여러 차례 간언하다 미움을 사기도 했다. 조선 개국 후 개국공신에 책봉되고도 신하로서 타의 모범이 되는 청렴함과 탁월한 재주를 갖춰 여러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았다. 또한 노모에 대한 효성이 뛰어나 예순 살이 넘은 나이에도 아침저녁으로 노모의 진지 상을 직접 들고 들어갔으며, 노모가 94세로 세상을 떠나자 매우 애통해하며 울부짖다가 쓰러지기까지 했다고 한다.
[묘소]
원래 노숭의 묘소는 서울특별시 구로구 천왕동 산39번지에 있었다. 그러나 2011년 상반기 영등포교도소가 구로구 천왕동으로 이전을 추진함에 따른 부득이한 사정으로 광주노씨 경평공파 종친회에서는 선조인 노숭의 묘소를 다른 곳으로 이전하기로 결정하고 2009년 6월 6일에 경기도 파주시 법원읍 동문리 산211번지로 새로운 묘역을 조성하여 안장하였다.
[상훈과 추모]
노숭이 죽자 조정에서 3일 동안 조회를 중지하였다. 『정진개국원종공신녹권(鄭津開國原從功臣錄券)』에 의하면, 조선 개국 후 한양윤(漢陽尹)으로서 개국원종공신에 추가로 녹훈되었고, 공신전 30결을 받았다. 시호는 경평(敬平)으로, 경상북도 상주에 있는 옥연사(玉淵祠)에 제향되었다. 노숭의 묘역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근래 건립한 신도비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