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0004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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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奎報 |
영어음역 | Yi Gyubo |
이칭/별칭 | 춘경(春卿),백운거사(白雲居士),지헌(止軒),인저(仁氐),삼혹호(三酷好),문순공(文順公)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서울특별시 구로구 |
시대 | 고려/고려 후기 |
집필자 | 안홍민 |
[정의]
고려 후기 구로 지역에서 활동한 문신이자 문장가.
[개설]
이규보(李奎報)[1168~1241]는 현재의 부평 지역 지방관인 계양도호부사를 지낸 인물이다. 이때 관장하던 지역이 현재의 구로구 일대를 포함하고 있었다. 관직에서 은퇴 후 현재의 금천구 인근에서 은거하였다고 전하는데, 1995년 구가 나뉘기 전에는 구로구에 속하였다.
[가계]
본관은 황려(黃驪). 자는 춘경(春卿), 호는 백운거사(白雲居士)·지헌(止軒), 초명은 인저(仁氐). 만년에 술, 거문고, 시를 즐겨 삼혹호(三酷好) 선생이라 불렸다. 아버지는 호부시랑(戶部侍郞)을 지낸 이윤수(李允綬)이다.
[활동사항]
이규보(李奎報)[1168~1241]는 어린 나이에 중국의 고전을 두루 읽었고, 글재주가 뛰어나 기재(奇才)라며 칭송을 받았다. 사마시(司馬試)에 수차례 낙방하였는데, 이유는 입신양명을 위한 과거에 맞는 글을 쓰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기성 문인인 강좌칠현(江左七賢)과 함께 어울리며 세월을 보내다가 1189년(명종 19) 사마시에 네 번째 응시하여 장원으로 급제하고, 이듬해 예부시(禮部試)에서 동진사(同進士)로 급제하였다. 하지만 관직과는 인연이 없어 1192년(명종 22) 개경의 천마산(天磨山)에 들어가 시문을 지으며 지냈다.
1193년(명종 23) 개경에 돌아와 관직을 갖지 못한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기도 하였다. 1197년(명종 27) 조영인(趙永仁)[1133~1202], 임유(任濡)[1149~1212], 최선(崔詵)[?~1209] 등 최충헌(崔忠獻) 정권의 요인들에게 관직을 구하는 서신을 보내 지방관리라도 등용해 줄 것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1207년(희종 3) 최충헌의 초청 시회(詩會)에서 이인로(李仁老) 등 당대 문장가와 겨루었던 「모정기(茅亭記)」가 최충헌의 마음에 들어 직한림(直翰林)에 임명되었다.
그 후 사록겸장서기(司錄兼掌書記)로서 전주목에 부임하였으나 1년 4개월 만에 동료의 비방으로 면직되었다. 1215년(고종 2) 우정언지제고(右正言知制誥), 1217년 우사간이 되었으나 부하의 무고로 정직되어 좌사간으로 좌천, 이듬해 이마저도 면직되었다. 1219년(고종 6) 최이(崔怡)의 각별한 후견 덕분으로 중벌을 면하고 계양도호부부사병마검할(桂陽都護府副使兵馬黔轄)로 부임하였다. 최충헌이 죽고 최이가 집권하자 최이의 후원 아래 고관으로서 입지를 다지게 된다.
보문각대제 지제고(寶文閣待制知制誥), 태복소경(太僕少卿), 장작감(將作監), 한림시강학사(翰林學士侍講學士), 국자좨주[國子祭酒] 등을 차례로 역임한 뒤 1228년(고종 15) 중산대부 판위위사(中散大夫判衛尉事)에 이르렀고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과거를 주관하기도 하였다. 1230년(고종 17) 위도(蝟島)에 유배되었다가 8개월 만에 풀려나 산관(散官)으로 있으면서 몽고에 대한 국서의 작성을 전담하였다.
그 후 판비서성사 보문각학사 경성부우첨사 지제고(判祕書省事寶文閣學士慶成府右詹事知制誥), 지문하성사 호부상서 집현전대학사 판예부사(知文下省事戶部尙書集賢殿大學士判禮部事), 수태보 문하시랑평장사(守太保門下侍郞平章事) 등을 역임하다가 1237년(고종 24) 수태보 문하시랑평장사 수문전대학사 감수국사 판예부사 한림원사 태자태보(守太保門下侍郞平章事修文殿大學士監修國史判禮部事翰林院事太子太保)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학문과 사상]
이규보는 뛰어난 문장가로서 많은 글을 남겼다. 그는 글의 연원을 정에 연유한 마음의 격동에 두고 “마음속에 격함이 있으면 반드시 밖으로 나타나게 되어서 가히 그것을 막을 수 없다”라고 하였다. 국가, 민족의식을 바탕으로 하여 글을 쓰기도 하였다.
그리고 시를 창작할 때 가장 먼저 요구되는 것은 ‘뜻을 세움[設意]’이라는 내용의 신의론(新意論)을 주창하였다. 그를 평할 때 권력에 아부한 문인이라는 비판이 있으나, 몽골과의 항쟁에서 문필로 큰 공을 세운 사실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이규보는 우리 민족과 역사에 대해 큰 자부심을 가지고 외세에 항거하였으며, 자기 삶의 경험에 입각하여 글을 짓는 것이 옳다고 믿는 문장가였다.
이규보가 지금의 구로 지역이 포함된 고려시대의 계양도호부와 인연을 맺은 것은 1219년이었다. 이때 계양도호부 부사로 좌천되어 오언율시인 「초정시(草亭詩)」를 남겼다.
[저술 및 작품]
1193년(명종 23) 「동명왕편(東明王篇)」과 「개원천보영사시(開元天寶詠史詩)」 등을 지었으며,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백운소설(白雲小說)』·『국선생전(麴先生傳)』 등의 저서와 다수의 시문을 남겼다. 또한 계양도호부부사병마검할 재임 시절 수많은 시문(詩文)을 남기어 훗날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과 『부평읍지(富平邑誌)』를 짓는 자료의 토대가 되었다.
[묘소]
묘소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길직리에 있으며, 1995년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15호로 지정되었다. 여주이씨 종중에서 관리하고 있으며, 1967년 후손들이 묘역을 정화하고 재실(齋室)을 복원하였다. 묘와 약간 떨어진 곳에 재실이 있다. 단분(單墳)으로 하단은 호석(護石)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봉분은 둘레 16m, 높이 1.8m이다. 봉분 앞에 상석과 장명등, 망주석, 문무석, 석양, 묘갈 등이 세워져 있다. 특히 문무석은 당시 유풍을 알 수 있는 귀한 자료이며, 석양 또한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상훈과 추모]
문순공(文順公)이라는 시호(諡號)를 받았는데, ‘문(文)’자가 들어가는 시호는 문장가에게는 큰 영광인 호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