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0004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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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弓裔 |
영어음역 | Gungye |
이칭/별칭 | 선종(善宗)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왕족·호족 |
지역 | 서울특별시 구로구 |
시대 | 고대/남북국 시대/태봉 |
집필자 | 안홍민 |
[정의]
후삼국시대 구로 지역을 지배 통치한 태봉(泰封)[후고구려]의 왕.
[가계]
아버지는 신라 제47대 헌안왕(憲安王)이고, 어머니는 이름을 알 수 없다. 아버지가 헌안왕이 아니라 제48대 경문왕(景文王)이라는 설도 있어 정확한 가계를 알 수 없으나 왕족이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활동사항]
탄생 설화에 의하면, 궁예(弓裔)는 5월 5일 외가에서 출생하였는데, 일관(日官)이 말하기를 단오에 태어났으며, 나면서부터 이가 나고, 또한 이상한 빛까지 나타나므로 장차 신라 국가에 해로울 것이라고 하였다. 이를 믿은 왕이 죽일 것을 명하여, 사자가 그 집에 가 강보에 싸인 아이를 빼앗아 다락 밑으로 던졌다. 이때 다락 밑에 숨어 있던 유모가 아이를 받았으나, 잘못하여 손가락으로 눈을 건드리는 바람에 애꾸눈이 되었다. 이후 유모에 의해 키워졌으며, 세달사(世達寺)에서 출가하여 선종(善宗)이라 하였다.
통일신라 말기 지방에서는 호족들이 대두하였고, 그들 가운데 두각을 나타낸 인물이 기훤(箕萱)과 양길(梁吉)이었다. 궁예는 891년 기훤에게 몸을 의탁했다가 이듬해 양길의 부하로 들어갔다. 이후 양길의 군사를 받아 강원도 원주 치악산 석남사(石南寺)를 거쳐 동쪽으로 진출하여, 주천(酒泉)[현 경상북도 예천]·내성(奈城)[현 강원도 영월]·울오(鬱烏)[현 강원도 평창]·어진(御珍)[현 경상북도 울진] 등 여러 현과 성을 정복하고 894년에는 명주(溟州)[현 강원도 강릉]에 이르렀다.
궁예는 자신을 따르던 3,500여 명의 무리를 14대로 편성하여 세력 기반으로 삼았고, 이들에 의해 장군으로 추대되었다. 이후 저족(猪足)[현 강원도 인제]·생주(狌州)[현 강원도 화천]·부약(夫若)[현 강원도 철원군 금화]·금성(金城)·철원(鐵圓) 등을 점령하였으며, 곧이어 패서(浿西) 지역의 무리들이 항복하였다. 지금의 서울특별시 구로구 지역은 궁예가 895년 한산주 관내의 10여 성을 복속시킴에 따라 궁예의 휘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양길과 결별하고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한 궁예는 왕건(王建) 부자의 투항을 받고, 승령(僧嶺)[현 경기도 장단 북쪽, 토산 남쪽]·임강(臨江)[현 경기도 장단]·인물(仁物)[현 황해북도 개풍군 풍덕]·공암(孔巖)[현 경기도 양평]·금포(黔浦)[현 경기도 김포]·혈구(穴口)[현 경기도 강화] 등을 복속하였다. 이에 양길이 국원(國原)[현 충청북도 충주] 등 30여 성을 취하여 궁예를 공격하였으나 오히려 패배하여 궁예의 세력은 더욱 커져 갔다.
899년 궁예는 송악군을 수리(修理)하고 왕건을 보내 양주·견주(見州)를 복속하였다. 또한 이듬해 광주·춘주(春州)·당성(塘城)[현 경기도 화성군 남양]·청주(靑州)·괴양(槐壤)[현 충청북도 괴산] 등을 평정함으로써 소백산맥 이북의 한강 유역 전역을 지배하게 되었다.
901년 궁예는 고구려의 계승자임을 자처하며 스스로를 왕이라 칭하였다. 그리고 904년에 국호를 마진(摩震), 연호를 무태(武泰)라 공표했다. 905년에는 송악에서 철원으로 수도를 옮기고 연호를 ‘성책(聖册)’으로 고쳤다. 천도 이후 패서의 13진을 평정하였고, 이에 평양성 성주 금용(黔用)이 투항하였다.
궁예는 강성해진 세력을 바탕으로 신라를 병합하려 하였다. 911년에는 연호를 다시 수덕만세(水德萬歲)라 고치고, 국호를 태봉(泰封)이라 개정하였다. 이 해 왕건으로 하여금 해로로 금성(錦城)을 점령하도록 하였다. 913년에는 정개(政開)로 연호를 다시 바꾸었다. 918년 궁예는 왕위에서 축출되는데, 홍유(洪儒)·배현경(裵玄慶)·신숭겸(申崇謙)·복지겸(卜知謙) 등이 왕건을 추대함으로써 현 구로 지역은 고려에 귀속되었다.
[학문과 사상]
궁예는 출생 과정에서부터 아버지로부터 버림을 받았기에 반신라적인 성향을 보였다. 왕족임에도 반신라적 성향을 갖게 된 궁예는 신라 조정에 반하는 세력을 한데 규합하여 신라 고대 사회를 해체하는 데 커다란 작용을 했다.
궁예가 세달사에서 선종이란 법명을 받았던 것으로 미루어 신라 법상종에 대한 이해가 깊었고, 스스로를 미륵불이라 칭한 것은 혼탁한 사회를 개혁하려는 의지가 강했으며, 사회 개혁 사상을 내포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해석하는 학자도 있다.
[저술 및 작품]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따르면, 궁예는 경문(經文) 20여 권을 지었으나 그 말이 요망스럽고 정도에 맞지 않았다고 한다. 때로는 강설(講說)도 하였는데, 석총(釋聰)이란 승려가 “모두 사설(邪說)·괴담(怪談)으로서 가르칠 수 없는 것이다.”라고 평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 경서가 전하지 않아 그 진위는 알기 어렵다.
[묘소]
강원도 평강군 삼방협(三防峽)에 궁예의 묘로 추정되는 무덤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