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0004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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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張文緯 |
영어음역 | Jang Munwi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서울특별시 구로구 |
시대 | 고려/고려 전기 |
집필자 | 안홍민 |
[정의]
고려 전기 구로 지역에서 활동한 문신.
[가계]
본관은 홍천(洪川). 할아버지는 상사봉어(尙舍奉御) 장진(張瑨)이며, 아버지는 검교군기소감(檢校軍器少監) 장제망(張齊望)이다.
[활동사항]
고조의 음서(蔭敍)로 내시성(內侍省)에 들어가 지내다가 여러 차례 성시(省試)에 응시하여 진사(進士)에 급제하였다. 명복궁녹사(明福宮錄事)·사문조교(四門助敎)를 거쳐 1109년(예종 4) 행영병마녹사(行營兵馬錄事)로서 숭녕진(崇寧鎭)[함경남도 함주]에서 여진인 38명을, 또 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정변분도(靜邊分道)로서 종군하여 6명을 참수하는 공을 세웠다. 그 공로로 액정내알자(掖庭內謁者)에 오르고, 숭명부주부(崇明府注簿)·시합문지후(試閤門祗候)를 역임하고 수주(樹州) 지사(知事)가 되었다.
그 뒤 시사재승겸추밀원당후관(試司宰丞兼樞密院堂後官)으로 승진하고 중서주서(中書注書)로 옮겼다. 권지감찰어사(權知監察御史)에 임명되고 안찰사의 위촉으로 수주에서의 치적을 보고하였다. 이 해에 진어사(眞御史)가 되었다. 서경유수통판(西京留守通判), 형부(刑部)와 공부(工部) 원외랑(員外郞), 호부낭중(戶部郞中)을 거쳐 예부상서(禮部尙書)가 되었다.
장문위는 농민들의 생활에 큰 관심을 가졌다. 수주지사 역임 당시 고을의 백성들이 기근이 들어 굶주렸는데, 그가 힘든 역사(役事)를 줄이고 밭을 개간하여 백성들을 넉넉하게 하였다. 또 주의 동쪽 교외에 2,500여 보(步) 가량의 땅을 파서 물의 흐름을 고르게 하여 수해를 방지하기도 하였다.
[묘소]
1134년(인종 12) 11월 27일 집에서 별세하여 개성부(開城府) 경내의 산에 장사 지냈다고 전해지나 정확한 위치 및 현존 여부는 알 수 없다.
[상훈과 추모]
장문위가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았다고 묘지명(墓誌銘)에 기록되어 있으나 예종과 인종 중 누구에게 하사 받은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의 묘지명은 아들 진사 장충정(張忠正)의 요청으로 예부시랑 예낙전(芮樂全)이 찬하였다. 묘지명에서는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 “장공(張公)이여, 일대의 영웅이었도다. 벼슬에 올라 현달하고 또 수(壽)를 누리고 생을 마쳤도다. 모든 것이 이루어졌으니, 그 이름도 무궁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