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0004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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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尹瓘 |
영어음역 | Yun Gwan |
이칭/별칭 | 동현(同玄),문숙(文肅)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서울특별시 구로구 |
시대 | 고려/고려 전기 |
집필자 | 안홍민 |
[정의]
고려 전기 구로 지역에서 활동한 문신이자 명장.
[개설]
윤관(尹瓘)[1040~1111]은 고려 전기 부평 지역의 지방관인 수주(樹州)의 지주사(知州事)를 지냈다. 이때 관장하던 지역이 현재의 구로구 일대를 포함하고 있었다. 윤관이 부임하였을 당시는 개경 근교의 큰 고을로 인근의 부평, 인천, 안산, 시흥, 양천, 고양, 교하, 김포 전체가 수주의 속현으로 지주사의 관할에 있었다. 윤관이 지방관으로 재직할 때 석곶(石串)[현 인천광역시 서구 석남동]에 있는 명당을 발견한 뒤 명당에 달걀을 묻으면 며칠 내 병아리가 부화한다는 설에 따라 이곳에 달걀을 묻었으나 이씨라는 사람이 탐하여 삶은 달걀을 넣어 윤관을 속였다는 설화가 전한다.
[가계]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동현(同玄). 파평윤씨(坡平尹씨)의 시조인 윤신달(尹莘達)이 고조(高祖)이다. 윤신달은 신숭겸, 홍유 등과 협력하여 궁예를 축출하고 왕건을 추대하여 삼한공신(三韓功臣)에 책록되었다. 아버지는 검교소부소감(檢校小府少監)을 지낸 윤집형(尹執衡)이다.
[활동사항]
윤관은 1074년(문종 28) 과거에 합격하여 습유(拾遺)·보궐(補闕)을 지냈고, 1087년(선종 4) 합문지후(閤門祗候)로 출추사(出推使)가 되어 광주·충주·청주 지역을 시찰하였다. 숙종이 즉위하자 1095년에 요나라, 1098년에 송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즉위 사실을 알렸다. 1099년(숙종 4) 한림시강학사(翰林侍講學士)에 추천되었으나 친척인 임의가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를 역임하고 있어 임명되지 못하였다. 1101년(숙종 6) 추원지주사가 되었고, 이듬해 왕명에 의하여 이굉(李宏)과 함께 진사시를 주관하였으며 이어 어사대부가 되었다.
이듬해 이부상서 동지추밀원사(吏部尙書同知樞密院事)를 거쳐 지추밀원사 겸 한림학사승지(知樞密院事兼翰林學士承旨)가 되었다. 1104년(숙종 9) 2월 동북면행영병마도통사(東北面行營兵馬都統使)가 되어 여진 정벌에 나섰다. 고려는 이미 1080년(문종 34) 여진의 세력을 크게 꺾은 바 있으나, 1103년(숙종 8) 우야소[烏雅束]의 동여진 세력이 함흥 부근까지 힘을 미치고 있었다. 여진의 기병이 정주관(定州關) 밖까지 쳐들어오자 숙종은 문하시랑평장사 임간(林幹)에게 여진을 평정하라고 명하였지만 크게 패하고 말았다. 이후 윤관이 왕명을 받고 북벌에 길에 오르게 된 것이다.
윤관은 3월에 동북면행영병마도통이 되어 기병을 앞세운 여진에게 패하여 화약(和約)을 맺고 철수하였다. 이에 전투력의 증강과 기병의 조련을 진언하여 특수 부대인 별무반(別武班)을 창설하였다. 1107년(예종 2) 부원수인 지추밀원사 오연총(吳延寵)과 17만 대군을 이끌고 중군은 정주로, 수군은 도린포(都鱗浦)로 진군하였다. 이 전투에서 거점 135곳을 격퇴하고 4,940명을 죽이고 130명을 생포하였다. 탈환한 각지에 장수를 보내 함주(咸州)·영주(英州)·웅주(雄州)·복주(福州)·길주(吉州)·공험진(公嶮鎭)에 성을 쌓고, 이듬해에 숭녕(崇寧)·통태(通泰)·진양(眞陽)의 3성을 더 쌓아 이른바 윤관의 9성 설치가 완결되어 함경도 일대를 석권하게 된다.
이에 우야소가 반발하여 가한촌(加漢村)에 이어 웅주성에서 전투가 일어났다. 예종은 그 전투의 공로로 윤관을 문하시중 판상서이부사 지군국중사(門下侍中 判尙書吏部事 知軍國重事)에 봉하였다. 여진은 해마다 조공을 바친다는 조건으로 9성을 돌려주기를 원하였다. 조정에서는 이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어 이 일대의 땅을 여진에게 돌려주게 된다. 윤관은 모함을 받고 관직을 박탈당하였고 처벌당할 위기에 처하지만, 예종이 비호하여 1110년(예종 5) 수태보 문하시중 판병부사 상주국 감수국사(守太保門下侍中判兵部事上柱國監修國史)에 봉하였다. 윤관은 사의를 표하였으나 예종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묘소]
묘소는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분수리 산4-1번지[혜음로 930]에 위치하며, 1988년 사적 제323호로 지정되었다. 1766년(영조 42) 21세손 윤봉구(尹鳳九)가 비문을 지었고 앞면의 글씨는 윤동섬(尹東暹)이, 뒷면의 글씨는 윤방(尹坊)이 쓴 신도비가 건립되었다.
[상훈과 추모]
윤관은 여진을 평정하고 1108년(예종 3) 3월 포로와 전리품을 가지고 개선한 공으로 추충좌리평융척지진국공신(推忠佐理平戎拓地鎭國功臣)에 봉해졌다. 1111년(예종 6) 별세한 후 내려진 시호는 문경(文景)이었으나, 후에 문숙(文肅)으로 고쳐졌다. 1130년(인종 8) 예종의 사당에 위패가 함께 모셔졌고, 고려 태조와 충의 공신을 모신 숭의전에도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