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0003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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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獨立運動家 |
영어음역 | Dongnibundongga |
영어의미역 | Independence Fighter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서울특별시 구로구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배성수 |
[정의]
개항기와 일제강점기 민족 독립을 위해 서울특별시 구로구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운동가들.
[개설]
개항기 일본 및 서구 열강의 침략으로 국권 상실이 가시화되자 국내에서는 국권 회복을 위한 치열한 투쟁이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구국 운동은 한일 강제 병합 이후 1919년의 전 민족적인 3·1운동과 조국 독립운동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여기서는 당시 구로지역과 인접하였던 지역의 독립운동가를 포함하여 시기별로 구분하여 서술하기로 한다.
[내용]
1. 개항기 항일운동가
1904년 러일전쟁의 승리를 통해 동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한 일본 제국주의는 한반도를 강점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일련의 조치를 단행하였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직후 한일 의정서를 통해 행정권을 장악하였으며, 1905년에는 을사늑약을 통해 외교권을 박탈하고 통감부를 설치하는 등의 조치를 통해 대한제국을 보호국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리고 1907년 6월에는 헤이그 사건을 빌미로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정미7조약을 통해 대한제국의 마지막 보루였던 군대까지 해산시켰다. 이때 해산된 대한제국의 군인들이 의병에 참여하게 되면서 항일운동은 전국적인 항쟁으로 발전하였다.
1) 성우경(成禹慶)
성우경은 1898년과 1904년 두 차례에 걸친 시흥농민운동을 주도하였다. 성우경은 농민측 협상 대표로 선정되어 일본의 내정 간섭으로 더욱 심각해진 부역 모집에 강력하게 항의하였고, 농민들을 규합하여 관공서 등을 공격하였다.
2)김태근(金泰根)
김태근은 평범한 농민으로 깊은 학식은 없었지만 평소부터 의기를 높이고 바른 일에 앞장 서는 정신과 기백이 있었다. 김태근은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비분강개하고 있던 차에, 조약 체결의 주역이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경부선 열차를 타고 수원 방면으로 향한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11월 22일 김태근은 안양역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열차가 역으로 들어오자 이토 히로부미를 향해 돌멩이를 던졌고, 김태근이 던진 돌멩이는 이토 히로부미가 타고 있던 열차의 유리창을 부수었지만 별다른 인명 피해는 입히지 못하였다. 김태근은 일본 경찰들에게 구속되어 심한 고문을 당했지만 당당히 소신을 말하였다고 한다. 이 사건으로 김태근은 태형에 처해지고, 시흥군수 김종국은 파면 당했으며, 경기도관찰사 정주영은 견책을 당하였다.
3) 장원겸(張元謙)
경기도 시흥 출신으로 길찬범(吉纂範) 의진에 참여하여 충청남도 직산에서 활약하였다. 1905년 11월 『을사늑약』으로 일제에 의해 자주적 외교권이 박탈되자 우리민족은 다양한 방법으로 본격적인 반일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였다. 1907년 「정미7조약」에 따라 군대가 해산되자 해산된 군인들이 대거 의병대열에 참여하여 국권회복운동은 전국적인 무력투쟁으로 확대되어 갔다. 장원겸은 1907년 박홍석 등과 함께 길찬범 의진에 가담하여 활약한 인물로 같은 해 8월 14일 동료 의병 수십 명과 함께 충청남도 직산군 순사주재소를 습격하여 병기를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 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909년 5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7년의 옥고를 치렀다.
2. 3·1운동기의 독립운동가
일제강점기 초 조선인의 대규모 저항에 직면한 일제는 이를 억누르기 위해 폭력적인 식민 통치 방식을 채택하였다. 한민족의 독립 의지를 꺾기 위해 헌병과 경찰을 동원하여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는 한편, 행정·경제·사회·문화 등 다양한 측면에 걸친 식민 통치 기반을 마련하고 수탈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일제의 폭압적인 통치 방식에 대해 한민족은 3·1운동이라는 전 민족적 거사로 저항하였고, 구로 지역 주민들 역시 격렬한 항일 시위를 일으키며 이러한 흐름에 적극 동참하였다.
1) 유익수(柳益秀)
구로지역의 만세운동은 3월 30일을 전후하여 가장 격하게 일어나게 되는데 수암면 일대에서는 18개 동리의 주민 2,000여 명이 유익수의 지휘 하에 수암리 비석거리에 집결하여 만세를 부르고 시위행진을 하였는데 유익수는 수암면 월파리에 거주하던 인물로 당시 시위대 선두에서 태극기를 들고 행진하다 체포되어 징역 1년에 처해진 인물이다. 같은날 저녁 8시 과천면 하리에서도 횃불시위운동이 일어났다. 주동자 이복래의 지시에 따라 주민 50여명이 남태령에 모여 횃불과 태극기를 들고 읍내까지 행진을 하였다.
2) 홍순칠(洪淳七)
홍순칠은 수암면 와리 482번지에 거주하던 농민으로 1919년 3월 30일 수암면 비석거리 만세운동을 주동했던 인물이다. 홍순칠은 전날인 3월 29일 국유지 소작인 수명에게 다음날의 거사에 대한 격문 내용을 전달하고, 만세운동에 참여할 것을 권고하였다고 한다. 당시 홍순칠 독립을 하게 되면 경작하고 있는 국유지는 경작자의 몫이 될 것이라 하며 만세운동에 참가할 것을 권유하였다는 점에서 당시 농민들이 공화제사상, 나아가 사회주의 사상까지 접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3) 이정석(李貞石)
1919년 3월 27일 소하리에 거주하는 이정석은 노온사리 주재소 부근에서 독립만세시위를 선동하다가 28일 아침 출동한 일본경찰에 강제 연행되어 치안법 위반자로 주재소에 구금되었다. 이때 부친 이종원이 같은 동리에 거주하는 최호천에게 도움을 청하였고, 이에 최호천은 윤의병과 함께 다음날 노온사리 주재소에서 만세운동을 벌였다.
4) 윤의병(尹宜炳)[1900~1960]
윤의병은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배재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3월 28일 밤 최호천과 함께 이정석 탈환 사건 및 광명 지역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소하리와 가리대를 중심으로 한 200명의 주민을 이끌고 야간에 노온사리 주재소로 가서 만세 운동을 벌였는데 이 당시 만세 운동은 폭력적인 모습도 보였으며, 일본의 행정기구에 대항했다는 의의도 있다.
5) 최호천[崔浩天]
최호천은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배재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3월 28일 밤 윤의병과 함께 이정석 탈환 사건 및 광명 지역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소하리와 가리대를 중심으로 한 200명의 주민을 이끌고 야간에 노온사리 주재소로 가서 만세 운동을 벌였는데 이 사건의 여파로 광명에서는 7명의 주민이 체포되었고, 최호천과 윤의병은 체포되어 2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