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0003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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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富平都護府 |
영어음역 | Bupyeong-dohobu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법령과 제도 |
지역 | 서울특별시 구로구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윤대준 |
[정의]
1413년부터 1895년까지 구로 지역에 설치된 조선 시대의 행정 구역.
[관련기록]
1454년(단종 2)년 간행된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당시 부평(富平)은 “서쪽으로 대해(大海)까지가 10리, 남쪽으로 인천까지가 10리, 북쪽으로 김포까지가 10리다. (중략) 호수(戶數)가 429호, 인구가 954명, 군정(軍丁)은 시위군(侍衛軍)이 20명, 선군(船軍)이 128명이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내용]
오늘날의 서울특별시 구로구, 부천시, 인천시 부평구 등의 옛 지명으로는 주부토군(主夫吐郡), 장제(長堤), 수주(樹州), 안남(安南), 계양(桂陽), 길주(吉州), 부평 등이 있다. 부평이란 지명은 1310년(충선왕 2) 여러 목(牧)을 없앨 때 종래의 길주목(吉州牧)을 부(府)로 강등시키고 그 명칭을 부평이라 한 데서 시작한다.
부평부(富平府)는 조선조에도 지명이 계속 이어졌고, 1413년(태종 13) 8도제를 시행하면서 지명 개혁을 단행할 때 부평도호부(富平都護府)가 되었다. 조선 초기 부평이 도호부가 설치된 이유는 인구가 많아서가 아니라 수군(水軍)을 중심으로 하는 군사 요충지 때문이었다. 당시 부평도호부는 전국 44개 도호부 중 하나였으며 종3품인 도호부사(都護府使)가 파견된 지역으로, 도호부이었던 강화(江華)와 군(郡)이었던 인천·해풍(海豊), 현(縣)이었던 김포·교동(喬桐)·양천(陽川)·통진(通津)을 관할하였다.
[변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