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00029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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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朝鮮時代 |
영어음역 | Joseonsidae |
영어의미역 | Joseon Period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서울특별시 구로구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윤대준 |
[정의]
1392년부터 1910년까지 조선 왕조 시기의 구로 지역의 역사.
[개설]
1392년 이성계가 건국한 조선은 지방의 통치를 체계적으로 정비하기 위해 전국을 8도로 나누고 그 밑에 부·목·도호부·군·현을 두어 각기 지방관을 파견하였다. 이때 구로 지역이 속한 부평도호부는 전국 44개 도호부 가운데 하나로 종3품인 도호부사가 파견되었다. 부평은 행정구역상으로는 수원진관(水原鎭管)에 소속되어 병영이 설치되었던 도호부(都護府)로서 인천을 속읍으로 거느리고 있는 행정 및 군사 요충지였다. 이는 김포·강화를 거쳐 한양과 황해도 해주로 이어지는 한강 수로에 자리 잡은 지역이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의 구로 지역]
오늘의 구로 지역은 과거 경기도 시흥군 상북면(上北面)과 동면(東面), 경기도 부평군 수탄면(水呑面),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일부 지역이 편입되어 이루어졌다. 조선시대 시흥 지역은 금주(衿州)[또는 금천(衿川)] 또는 시흥(始興)이라 불렸고 부평의 일부가 포함된다. 광명시 또한 오래전부터 금주에 속한 지역이었다. 따라서 이 지역의 역사를 살펴보려면 금주, 곧 금천과 부평의 역사를 함께 고찰하여야 한다.
조선은 1413년(태종 13) 대대적인 지명 개혁을 단행하였다. 각 도의 부관(府官)은 도호부로 고치고 감무(監務)는 현감(縣監)으로 고쳤으며, 무릇 군이나 현에 ‘주(州)’자가 든 고을은 경주·전주와 같이 종2품 부윤(府尹)이 배치된 부와 정3품 목사(牧使)가 배치된 목 이외는 모두 ‘주’자의 사용을 금하고 산(山)·천(川)·해(海)·성(城)·원(原) 등으로 고쳤다. 이때 부평은 부평부에서 부평도호부로, 금주는 금천현으로, 과주(果州)는 과천현(果川縣)으로 개칭되었다.
1414년(태종 14) 금천현을 과천현과 병합하여 금과현(衿果縣)으로 하였다가 2개월 뒤 혁파하였고, 다시 양천현과 병합하여 금양현(衿陽縣)으로 하였다가 1년 뒤에 금천현으로 고치고 현감을 두었다. 1456년(세조 2) 금천현을 과천현에 병합하였다가 곧 복구하였고, 1795년(정조 19) 금천현을 시흥현으로 고쳤다. 본래 시흥은 고려 초에 금주의 별호(別號)였는데 약 800년 만에 행정 지명이 된 것이다.
금천현 당시에는 종6품인 현감이 파견되었으나 시흥현으로 바뀐 뒤에는 종5품관을 현령으로 파견하였다. 이와 같은 승격은 이때를 전후하여 정조가 아버지인 사도세자 능으로 행차하는 일이 매우 잦아 시흥에서 잠시 머무르는 일이 빈번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부평은 부평도호부를 설치한 뒤 1438년(세종 20)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8년 뒤 복구되었고, 1505년(연산군 11)에는 살인 사건의 범인이 이 고장 출신이라는 이유로 1년간 부로 혁파되었다가 복구되기도 하였다. 1698년(숙종 24) 인조의 아버지로 후일 추증된 원종의 능인 장릉(章陵)에 불을 지른 방화범 최필성(崔弼成)이 태어난 곳이라 하여 10년간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복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