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00028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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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高麗時代 |
영어음역 | Goryeosidae |
영어의미역 | Goryeo Period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서울특별시 구로구 |
시대 | 고려/고려 |
집필자 | 권순형 |
[정의]
고려 왕조 시기[918~1392] 구로 지역의 역사.
[변천]
고려시대에 구로 지역은 행정구역상 수주(樹州)였다. 수주는 원래 고구려의 주부토군(主夫吐郡)인데 신라 경덕왕이 장제군(長堤郡)으로 고쳤다. 후삼국시대에 궁예 세력의 지배를 받다가 곧 고려의 영토가 되었다. 고려 초에 수주로 고쳤고 995년(성종 14) 단련사(團練使)를 두었다가 1005년(목종 8)에 이를 없앴으며, 1018년(현종 9)에 지주사(知州事)로 고쳤다. 1150년(의종 4)에 안남도호부로 고쳤고, 1215년(고종 2)에 또다시 계양도호부(桂陽都護府)로 고쳤다. 1308년(충렬왕 34)에 길주목(吉州牧)으로 승격시켰다가 1310년(충선왕 2)에 부평부(富平府)가 되었다. 수주에는 6개의 속현이 있었는데 금주(衿州), 동성현(童城縣), 통진현(通津縣), 공암현(孔巖縣), 김포현(金浦縣), 수안현(守安縣)이다.
이 중 금주(衿州)는 현 구로구의 안양천 동쪽에 해당하는 구로동, 가리봉동, 신도림동 지역이 포함된다. 안양천 서쪽인 고척동, 오류동, 개봉동, 온수동, 항동, 궁동, 천왕동은 수주에 속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금주는 본래 고구려 잉벌노현(仍伐奴縣)으로 통일신라시대에 한산주에 속하였다. 757년(경덕왕 16) 곡양현(穀壤縣)으로 이름이 바뀌어 율진군(栗津郡)의 속현이 되었다. 940년(고려 태조 23) 금주(衿州)가 되었으며, 성종 14년 관내도에 소속시키고 단련사를 두었다. 목종 8년 단련사를 혁파하고, 현종 9년 경기 10현 중의 하나인 수주현에 속하게 하였다. 1182년(명종 12) 감무(監務)를 두었다.
[교통과 방어시설]
1. 수주역
수주의 교통시설로는 수주역(樹州驛)이 있다. 수주역은 청교도(靑郊道)에 속한 15개 역 중의 하나였다. 청교도는 수도인 개경과 부도인 남경을 잇는 역로(驛路)로서 개경 및 경기 지역을 연결하는 도로망이다. 청교도에 속한 역으로는 청교(靑郊)[개성(開城)], 통파(通波)[임진(臨津)], 마산(馬山)[봉성(峯城)], 벽지(碧池)[고봉(高峯)], 영서(迎曙)[남경(南京)], 평리(平理)[덕수(德水)], 상림(橡林)[적성(積城)], 단조(丹棗)[적성(積城)], 청파(淸波)[남경(南京)], 노원(蘆原)[남경(南京)], 행주역(幸州驛)[수안(守安)], 종승(從繩)[수안(守安)], 금륜(金輪)[수주(樹州)], 중림(重林)[인주(仁州)], 녹양(綠楊)[견주(見州)]이 있어 고려시대 수주의 지리적 위상을 잘 보여준다.
2. 계양산성
수주의 방어시설로는 계양산성(桂陽山城)이 있다. 계양산성은 1992년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10호로 지정되었으며, 계양산 동쪽 능선에 자리 잡고 있다. 현재 구로 지역의 일부가 포함되어 있는 수주 지역을 방어하기 위한 산성으로 처음 축조된 것은 삼국시대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계양산고성(桂陽山古城)이란 이름으로 나와 있으며 “돌로 쌓았고 둘레가 1천 9백 37척인데 지금은 모두 무너졌다”고 기록되어있다. 고려시대에는 거란족 및 몽골족, 왜구 등 많은 외침이 있었다. 계양산성은 외침에서 큰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이며, 적군이 수주 지역에 쉽게 침범할 수 없게 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전쟁의 큰 피해 없이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유지할 수 있게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인물]
1. 지방관
1) 김광조
김광조(金光祖)는 어린 나이에 시부(詩賦)로써 국자감시에 장원급제하고, 1184년(명종 14) 금주감무(衿州監務)가 되어 청렴한 다스림으로 이름이 났다. 김광조의 아버지는 김유신(金有臣)으로 1148년(의종 2) 곽주통판(郭州通判)이 되었다가 1163년(의종 17)에 작고하였다. 어머니는 원주(原州) 사람으로 전중내급사동정(殿中內給事同正) 이언장(李彦章)의 딸이다. 남편이 일찍 죽었으나 절의를 지켜 홀로 살았으며, 독실한 불교신자로서 평소 다른 사람의 잘잘못을 말하지 않고, 늘 불경을 읽었다. 어머니의 훌륭한 가르침이 김광조같은 양리(良吏)를 낳았다 하겠다.
2) 장문위
장문위(張文緯)[?~1134]는 홍천(洪川) 사람으로 아버지는 검교군기소감(檢校軍器少監)을 지낸 장제망(張齊望)이다. 장문위는 어려서부터 학문에 게으르지 않았다. 관직에 나아가 수주지사(樹州知事)가 되었는데, 기근이 들자 힘든 역사(役事)를 줄여주어 백성들이 감복하였다. 또한 밭으로 개간되지 않은 곳은 마름풀을 베고 동산에 씨를 뿌리니, 그 곡식이 해를 이어 크게 넉넉하여져서 공부(貢賦)에 충당할 수 있게 되었다. 또 주의 동쪽 교외는 땅이 습기가 많고 강물이 때로 농사를 결딴내어 그 해의 노력을 잃게 하기도 하였다. 장문위가 이에 2,500여 보(步) 가량의 땅을 파서 물의 흐름을 고르게 하니 백성이 그 해를 입지 않았다. 임기를 마친 뒤 내직으로 들어가 예부상서까지 승진하고 1134년(인종 12) 사망하였다.
2. 출신 인물
1) 노준경
노준경(盧俊卿)[?~1343]은 고려 말 문신으로서, 여말선초 재상을 지낸 노숭의 아버지이다. 충혜왕 때 감찰지평(監察持平)으로 왕을 호위하다가 원에서 충혜왕을 압송해갈 때 이를 저지하며 왕을 호위하다 살해되었다.
2) 노숭
노숭(盧嵩)[1337~1414]은 1365년 문과에 급제하여 근시직에 있으면서 우왕의 유흥을 여러 차례 눈물로 간하였다. 어느 날 우왕이 말을 달려 노숭의 정원에 들어가 이것이 누구의 집이냐고 물었다. 종자가 노숭의 집이라 하자 왕이 말을 달려 급히 나가버리기도 하였다. 고려 말 왜구가 끊이지 않아 바닷가의 마을들이 텅 비게 되니 노숭이 허물어진 기강을 진작시켜 위엄과 은혜를 아울러 행하고, 조정에 청해 백성들의 조세를 3년간 면제케 하였다. 또 전주의 용안(龍安)과 나주의 영산(榮山)에 성을 쌓아 조세 운반시 왜구의 피해를 막았다. 또 여러 주에 의창(義倉)이 없었는데, 조정에 청해 이를 설치하기도 하였다. 노숭은 조선 건국에 참여해 공신이 되고, 벼슬이 검교 의정부우의정(檢校議政府右議政)에 이르렀다. 1414년(태종 14) 사망하였으며, 시호는 경평(敬平)이다. 묘는 구로구 천왕골과 항동의 경계가 되는 산등성이 자락에 위치해 있다.
3) 안경공
안경공(安景恭)[1137~1421]은 찬성사를 지낸 안축(安軸)의 손자로 급제한 뒤 사헌지평, 예의정랑 등을 역임하였다. 경상도안렴사로서 합주의 사노(私奴)들이 검대장군(劍大將軍), 초군장군(抄軍將軍), 산군장군(散軍將軍) 등을 자칭하며 재물을 강탈하고 장차 그 주인과 수령을 죽이고 반란을 일으키려 했다. 이에 안경공이 주의 군사를 파견해 그들을 잡아 죽였다. 삼사좌사, 예문관제학, 좌대언 등을 거치고 조선 건국에 참여해 공신이 되었다. 1416년 보국숭록대부 집현전대제학 흥녕부원군(輔國崇祿大夫集賢殿大提學興寧府院君)이 되었다. 시호는 양도(良度)이다. 묘소가 현 구로구 개봉1동 백사리에 있다.
[문화]
이규보의 시에 보면, 현 구로 지역의 일부가 속해 있던 부평부에 대해 그 풍속을 “인순사간(人淳事簡)”, 즉 ‘사람이 순박하고 일이 간단하다’고 표현하고 있다. 또한 구로구는 고려시대의 경기 지역으로서 지배층의 경우 화려한 개경 문화의 영향을 받을 수 있는 지역이었다. 고려는 국초부터 연등회와 팔관회를 성대하게 치렀는데, 문종 때 12년에 걸친 공사를 마치고 2천 8백 칸에 이르는 대사찰 흥왕사가 낙성되었다. 그 절에서 5주에 걸쳐 연등대회를 열었는데, 정부의 모든 관리들과 안서도호부[해주], 개성부, 광주, 수주[수원], 양주, 동주[철원], 수주(樹州) 등 5개 주와 강화, 장단의 두 현들에게 준비를 명하였다. 대궐에서부터 흥왕사 문간에 이르기까지 5색 비단으로 감은 시렁대를 즐비하게 세워 비늘[鱗]처럼 겹겹이 잇대이게 하고, 왕의 수레가 통과하는 큰길 좌우에는 장대에 단 등불을 수풀처럼 세워 대낮같이 밝게 하였다. 수주의 관리들과 일부 백성들 역시 연등회를 관람하며 즐겼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