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00026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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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古代 |
영어음역 | Godae |
영어의미역 | Ancient age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서울특별시 구로구 |
시대 | 고대/고대 |
집필자 | 오계화 |
[정의]
초기국가시대부터 남북국시대까지의 구로 지역의 역사와 문화.
[개설]
구로 지역을 포함한 한강 유역에서 독자적 정치 체제를 갖춘 집단들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는 것은 철기 문화를 배경으로 한 삼한시대부터이다. 특히 한강 유역은 삼한 가운데 마한이 자리 잡은 지역이었다. 3세기경 편찬된 『삼국지(三國志)』「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 한전(韓傳)에 따르면 마한은 약 50여 개의 소국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그 영역은 서울을 포함하여 경기도·충청도·전라도 지역을 포괄하였다. 백제는 이러한 마한의 소국 가운데 하나로 출발하여 마한의 다른 소국들을 병합해 가며 발전했다. 초기에는 마한의 한 소국이었던 백제는 지금의 서울특별시 송파구 일대를 중심으로 성장한 것으로 보인다.
[구로 지역과 초기 백제]
마한 50여 개 소국 가운데 지금의 구로 지역에 있던 소국의 실체는 명확하지 않으나 우휴모탁국(優休牟涿國)을 부평 지역에 비정하는 견해가 있어 그 영향권에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우휴모탁국을 강원도 춘천 지역에 비정하는 견해도 있어 단정하기 어렵다. 특히 오늘날 인천 지역에 해당하는 미추홀 집단이 백제 온조에게 귀부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 기사의 정확성은 문제가 되나 백제 초기부터 인천 지역 일대가 백제의 영향 아래 있었을 가능성은 높다. 따라서 백제 중심지와 인천 사이에 있었던 구로 지역도 일찍부터 초기 백제의 관할 하에 여러 집단이 취락을 이루고 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의 각축]
백제는 구로 지역을 포괄한 한강 유역을 선점하고 영역을 넓혀 나가, 전성기에는 강역이 황해도에서 전라도에 이르렀다. 그러나 5세기 후반 고구려가 백제의 한성을 함락하고 지금의 아산·천안·충주·조령까지 영토를 확장함에 따라 구로 지역도 고구려에 편입되었다. 이때 고구려는 점령한 지역에 군현을 설치하였는데, 이 가운데 구로 지역을 포함하고 있던 곳은 주부토군(主夫吐郡)과 잉벌노현(仍伐奴縣) 등이었다.
이후 한강 유역을 둘러싼 삼국 간의 다툼이 계속되다가 마침내 신라가 한강 유역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신라는 한강 유역을 점유한 뒤 신주(新州)를 설치하였는데, 이때 구로 지역도 신주 관할이 된 것으로 보인다. 그 후 신라는 당과 연합하여 7세기 중반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당의 잔여 세력을 몰아냄으로써 삼국 간의 오랜 긴장은 일단락되었다.
[신라의 삼국통일]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신문왕 대에 확대된 영토를 효율적으로 운영하고자 행정구역 개편을 단행하여 전국을 9주 5소경으로 편제하였다. 그 가운데 한산주는 경기도와 황해도 대부분 지역, 강원도·충청남도·충청북도, 평안남도 일부까지 포괄하는 가장 넓은 지역으로 오늘날 구로 지역을 포함하고 있었다.
757년(경덕왕 16) 한산주를 한주(漢州)로 고쳤는데 구로 지역은 한주에 포함된 지역 가운데 장제군과 율진군 곡양현(穀壤縣)에 속하였다. 고구려 때 장제군은 주부토군(主夫吐郡), 율진군 곡양현(穀壤縣)은 잉벌노현(仍伐奴縣)이었는데 이때 이름을 고쳤다.
[후삼국으로의 분열]
통일신라 말기 사회·경제적 모순이 심화되고 중앙 정계가 혼란을 거듭하면서 지방에 대한 통제력도 느슨해져 지방 유력자들이 정치적으로 독립하는 토대가 형성되면서 호족이 출현하였다. 지방에 기반을 둔 호족은 일정 지역에서 독자적 군사력을 보유하고 사람들을 지배하면서 신라 사회의 해체를 가속화시켰다.
신라 수도인 경주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던 한산주 관내에서도 일찍부터 호족이 출현한 것으로 보인다. 지금의 구로구 일부 지역을 포괄하고 있던 장제군에 부평이씨 시조인 이희목(李希穆)이 유력한 호족으로 등장하였는데, 고려 건국 후 공신으로 임명되기도 하였다.
[관련 유적]
구로 지역을 포함한 한강 유역은 일찍부터 마을을 이루어졌다. 철기 문화를 토대로 마한의 소국들이 일어나기 시작했을 때, 구로구 일대에도 주변을 아우르며 독자적 정치 집단이 형성되었을 가능성이 있지만 확인된 바는 없다. 그러나 초기 국가 형성에 이르지 못했어도 상당한 규모의 마을들이 자리를 잡았던 곳으로 여겨진다.
이후 구로 지역을 포함한 한강 유역은 삼국의 각축장이 되었는데, 구로구 일대의 주민들은 관할 정치 집단의 변동과는 별도로 생업의 공간으로 지역을 지키며 살아갔다. 구로 지역에 살았던 고대인들의 유적은 많이 발견되지는 않았지만 구로구 항동에 있는 유물산포지들은 그 흔적의 일부를 보여주고 있다. 유물산포지 가운데 삼국시대 주거·분묘 유적이 포함되어 있을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