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1210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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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廟號 |
영어공식명칭 | Temple Name |
분야 | 역사/ 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기도 구리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김미엽 |
[정의]
경기도 구리시에 있는 조선 왕릉인 동구릉이나 종묘 등에 임금의 신위를 모실 때 올리는 호칭.
[개설]
왕이나 황제가 죽은 뒤 종묘에 신위(神位)를 모실 때 올리는 호(號)가 묘호이다. 앞의 글자는 시법(諡法)에 따라 정해지고 뒤의 글자는 종가의 계통[宗系]과 조공 종덕(祖功宗德)[공이 있는 자는 조로 하고 덕이 있는 자는 종으로 한다]에 근거하여 붙였다. 고려의 경우 국가를 창업한 왕건만 조를 붙였는데 반하여, 조선의 경우 조(祖)가 종(宗)보다 우월하게 인식되었으며, 조를 붙인 경우가 태조 이성계를 비롯하여 상당히 많았다.
[묘호의 의미와 추상 절차]
묘호가 있다는 것은 후대가 제사를 받듦으로써 선대(先代)로 인정하는 것이다. 반면 연산군(燕山君)이나 광해군(光海君)은 실제 왕위에 올라 정치를 하였지만 묘호가 없기 때문에 선대로 인정되지 않는다. 묘호는 왕이 승하하면 왕위를 계승한 국왕과 대신들이 논의하고, 이후 대신들이 삼망(三望)을 올리면 새 국왕이 그중 하나를 낙점하여 결정된다. 따라서 최종 결정권자인 새 국왕은 묘호에 대한 직·간접적인 이해 당사자이므로 묘호의 의미가 좌우될 수 있었다.
묘호는 두 글자로 만들어진다. 앞의 한 글자는 시자(諡字)로서, 시법에 따라 정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뒤의 한 글자는 종가의 계통과 조공 종덕의 예제(禮制)에 근거하여 조나 종을 붙인다. 우선, 시자는 생전의 행적을 꼼꼼하게 따져 결정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국왕이 생전에 선호하던 글자로 결정되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예종(睿宗)은 일찍이 손수 예종이란 두 글자를 책등에다 쓰고 “죽어서 이 시호를 얻으면 만족하겠다.”고 하였다. 명종도 “시호를 명(明)으로 얻으면 좋겠다.”고 하였으며, 영조는 당시 경연을 담당한 신하에게 “나로 하여금 영(英)자를 얻어 묘호를 삼게 하면 만족하겠다.”고 하였다.
조종(祖宗)의 추증은 종계(宗系)와 조공 종덕의 원리를 적용하되, 반드시 일정한 원칙이 있거나 조가 종보다 우월한 것이 아니었다. 대체로 우리나라의 경우 건국을 하였을 경우, 그리고 나라를 중흥시킨 경우, 그리고 전쟁의 위기에서 구하였을 경우 조(祖)를 추증하였다. 이에 반해 왕위를 정통으로 계승하였을 경우 종(宗)을 추증하였다. 신라 시대의 경우 무열왕이 태종이라는 묘호를 가졌고, 고려 시대의 경우 태조 왕건만이 조의 묘호를 가졌으며, 나머지 왕은 종을 추증하여 철저히 조종법을 지켰다. 이에 비해 조선 시대의 경우 27명의 왕 중 태조 이성계를 포함하여 7명이 조(祖)의 묘호를 가졌다. 즉, 단종을 쫓아냈지만 나라의 기틀을 튼튼히 했다고 평가되는 세조(世祖), 임진왜란을 겪은 선조(宣祖), 반정(反正)과 호란(胡亂)을 겪은 인조(仁祖), 영조(英祖)와 정조(正祖), 그리고 홍경래의 난을 치른 순조(純祖) 등이 있다. 반면 중종(中宗)은 반정을 통해 왕위에 올랐지만 성종(成宗)의 직계를 우선시하여 중종으로 결정되었다.
[동구릉과 묘호]
경기도 구리시의 동구릉에는 조선 태조의 능인 건원릉(健元陵)을 비롯하여 문종의 현릉(顯陵), 선조의 목릉(穆陵),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의 휘릉(徽陵), 현종의 숭릉(崇陵), 경종의 비 단의왕후의 혜릉(惠陵), 영조의 원릉(元陵), 익종의 수릉(綏陵), 헌종의 경릉(景陵) 등 9릉 17위가 모셔져 있다. 이 중 처음의 묘호가 개정된 경우는 선조와 영조이다. 선조의 처음 묘호는 선종(宣宗)이었다. 광해군은 즉위하던 해부터 부친인 선종의 묘호를 개정하고자 하였고, 마침내 1616년(광해군 8) 선조(宣祖)로 바꾸었다. 이는 1608년 치러진 선조의 국장과 관련된 문서인 『선조 국장도감일이방의궤(宣祖國葬都監一二房儀軌)』의 원래 제목이었던 ‘선종 소경 대왕 국장도감일방의궤(宣宗昭敬大王國葬都監一房儀軌)’, ‘선종 소경 대왕 국장도감이방의궤(宣宗昭敬大王國葬都監二房儀軌)’라는 표지명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영조의 경우도 영종(英宗)이었던 것을 1889년(고종 26) 12월에 개정하였다. 『영조 묘호도감의궤(英祖廟號都監儀軌)』는 조선 21대 국왕인 영종의 묘호를 영조로, 시호를 '정문 선무 희경 현효(正文宣武熙敬顯孝)'로 개상하고 존호를 '중화 융도 숙장 창훈(中和隆道肅莊彰勳)'으로 추상하며 정성 왕후(貞聖王后)에게 원렬(元烈), 정순 왕후(貞純王后)에게 정현(正顯)이라는 존호를 추가로 올리는 것으로, 1889년 12월부터 다음해 3월까지의 과정과 절차를 기록한 것이다. 이렇게 묘호를 바꾸는 것은 은연중에 종보다는 조가 격이 높다는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었으며, 1857년(철종 8) 순종에서 순조로, 고종 때 정종에서 정조(正祖)로 개정한 것은 왕권의 정통성을 부각시켜 왕권을 강화하려는 뜻도 포함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