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9C0102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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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경상북도 고령군 우곡면 도진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정동락 |
[울고 왔다가 울면서 떠난다는 도진리]
도진리는 고령박씨들의 집성촌이다. 2010년 현재 마을의 전체 호수는 106호이며, 고령박씨는 89호 정도로 전체의 약 90% 정도를 차지한다. 그 외에 곽씨, 김씨, 노씨, 정씨, 한씨 등이 살고 있다. 고령박씨 외의 타성 사람들은 마을에서 식당이나 가게 등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고령박씨들은 다른 성씨들에 대해서도 배타적이지 않고 잘 어울려 지낸다고 한다. 그 때문에 도진리의 박씨들은 “우리 마을에서 살다가 떠난 사람은 모두가 두 번 운다.”고 말한다.
“도진은 타지 사람들이 마을로 들어올 때 울고, 나가면서 또 울고 간다. 처음 마을에 살려고 들어올 때는 너무 오지에 있어서 들어오기 싫어서 운다. 하지만 이곳에 정착해서 살다 보면 마을 사람들과 정이 들어서 타지로 이사 갈 때는 떠나기 싫어서 다시 울면서 간다. 외지에서 들어온 사람들이 성공도 하고 돈도 많이 버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이처럼 도진리는 들어오기도 힘들지만 떠나기는 더욱 힘든 마을이라고 한다. 인심 좋고 살기 좋은 무릉도원 도진리. 고령박씨들의 집성촌인 이곳에서 40년을 살아 온 청주한씨 한시학 씨를 만나 보자.
[우곡에 처음으로 우체국을 개국하다]
도진리 앞으로 지나가는 지방도 67호선에서 우곡면사무소 방향으로 난 도진3길을 따라 가다보면 왼쪽에 우곡우체국과 그 옆에 우체국택배상담소가 있다. 이곳이 바로 한시학 우체국장이 평생에 걸쳐 가꾼 삶의 터전이다.
한시학 씨는 1937년 도진리에서 회천[모듬내] 건너 마주 보이는 대곡리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도진국민학교[현 우곡초등학교 도진분교]로 진학하여 졸업하고, 고령중학교로 진학했던 1950년에 6·25전쟁이 발발하였다.
우곡면 지역은 국군과 인민군이 치열하게 대치하는 낙동강 전선의 중심지에 해당하였다. 그 때문에 대곡리와 도진리 일대에도 인민군이 많이 주둔해 있었다. 특히, 도진리의 죽연정은 인민군의 대대본부로 활용되기도 했다. 또 대곡리에는 국군이 비행기로 폭격도 했다.
6·25전쟁 중인 1950년 11월 아버지가 작고해 가정 형편이 어려워지자 한시학 씨는 중학교와 고등학교는 야간부를 졸업하였다. 그리고 육군에 입대해 논산에서 군 생활을 한 뒤 1961년 제대하였다. 제대 후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대곡리에서 양수장 사업을 시작했다. 회천의 물을 퍼서 밭을 논으로 만들어 벼농사를 짓게 하는 사업이었다. 대략 5년 정도 이 사업을 했으나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양수장 사업이 실패하자 그는 도진리로 이사 와서 1966년 8월 1일 우곡우체국을 개국하고, 30세 때 우체국장으로 취임하였다.
군대 생활 당시 군 상관이 제대 후 우체국 사업을 한 번 해 보라고 권고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우곡면에서 처음으로 우편 사업을 시작한 이후 한시학 씨는 40년 이상을 도진리 사람으로 살게 되었다. 우체국을 처음 개국할 당시는 제1차 경제개발5개년 계획의 마지막 해로, 1면 1우체국 제도가 생겼던 해여서 우곡우체국은 별정우체국으로 지정되었다.
[우곡그린수박 택배 사업을 개발하다]
한시학 씨는 처음 우체국을 개국하고 나서 고생도 많이 했다고 한다.
“1966년 고령에서 우체국을 처음 개국한 사람들은 중도에 많이 포기했어요. 지금까지 우체국을 하고, 또 우체국장으로 퇴임한 사람은 고령에서는 나 하나뿐입니다.” 그러다가 1970년경에 우체국에 전화 교환이 생겨 전화국 업무도 함께 병행하면서 우체국이 크게 발전하였다. 전화 교환 사업은 이후 1982년경에 고령읍[현 대가야읍]으로 통합되었다.
또, 1975년에는 우곡면에서 처음으로 우곡주유소[유류취급소]를 운영하기 시작하였다. 마침 당시에는 모듬내의 제방 건립 공사가 한창이었는데, 이 공사에 유류를 공급하게 되어 돈을 조금 벌었다고 한다. 유류취급소는 1993년에 그만두었다.
한편, 우곡우체국은 1982년 이후 우편 취급 업무만을 하다가 1991년부터 우체국 택배 사업을 시작하였다. 이때 전국에서 처음으로 우곡 지역의 특산물인 우곡그린수박을 택배로 배달하는 사업을 개발하였다. 수박은 배달 중 쉽게 파손되기 때문에 모두들 어렵다고 했지만, 포장 박스의 재질을 두껍게 하고 내부를 스프링 방식으로 만들어 외부 충격에 견딜 수 있도록 설계하였다. 당시 포장 박스 개발은 칠성시장의 갈치박스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완성했다고 한다.
그리고 2004년 6월 4일 KBS의 ‘신화창조의 비밀’ 프로그램에서 우곡그린수박이 방영되면서 우체국 홈페이지에 주문이 쇄도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수박 택배 사업은 성공을 거두었다. 그 덕분에 2005년에는 우정사업본부에서 별정우체국 우수 경영 사례로 전국에 소개되기도 했다. 또, 2006년에는 정보통신부장관으로부터 우체국 택배차를 부상으로 받기도 했다고 성공담을 이야기한다.
현지 농산품을 우체국을 통해 도시의 가정집으로 직접 배달하는 이 사업은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경영 사례였던 것이다. 이후 매년 5월에서 6월만 되면 전국으로 배달되는 수박이 우곡우체국 앞을 가득 채우는 진풍경이 연출된다.
한시학 씨는 2005년 8월 우체국장직을 정년퇴임하고 우체국은 큰아들인 한석동 씨에게 승계하였다. 이후 한시학 씨는 2006년부터 대한노인회 우곡면 분회장[우곡면 노인회장]으로 취임하였다.
[마을이 발전할 수 있다면 뭐든 해야지]
우곡면 노인회관 은 2005년에 준공되었는데, 취임 당시 내부의 편의 시설이 부족했다. 이에 한시학 씨는 노인회장으로 취임한 후 도서와 가구 등을 구입해 노인회관을 ‘준도서관’으로 만들고, 노래방 기기 등 각종 편의 시설을 갖추었다. 이렇게 하여 우곡면 노인회관은 우곡면 노인회 회원 약 230명의 편안한 쉼터로 활용되고 있다.
지난 40여 년간 우곡우체국을 운영한 한시학 씨는 고령, 더 나아가 우리나라 우체국 역사의 산 증인이다. 그간 한시학 씨는 우곡면에서 처음으로 우체국을 만들고, 통신 사업을 개통하였다. 특히, 수박을 전국적으로 배달하는 우체국 택배를 개발하고, 지역의 소득 증대에 기여한 점 등에 대해서는 보람을 느끼고, 자부심도 높다. 또, 정년퇴임 후 노인회장 일을 맡으면서 우곡면 노인회가 발전하는 데 일조한 것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우곡우체국은 내가 설립하고, 또 평생의 땀이 밴 분신과도 같은 곳입니다. 앞으로의 소망은 우곡우체국이 영구적이고 지속적으로 발전해 나가는 것입니다.”고 바람을 이야기한다. “대곡에서 도진리에 이사 온 후 40년 이상을 줄곧 도진리에서 살아왔어요. 그 동안 도진리의 고령박씨 사람들과는 허물없이 잘 어울려 지냈지요. 나는 한씨이지만 고령박씨 사람들은 ‘이웃사촌’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한씨로서 서운한 감정을 느낄 때가 전혀 없지는 않았지만, 형제들 간에도 좋지 않을 때가 있잖아요. 그런 점에서 도진 사람들은 가족과 마찬가지예요. 내가 후회하지 않는 평생을 살 수 있었던 것도 마을 사람들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고령박씨 세거지에서 40년 이상을 타성으로 살아온 한시학 씨의 삶에는, 한씨나 박씨와 같은 성씨의 차이점에 골몰하기보다는 도진 사람이란 공통점을 가꾸어 나가는 지혜가 숨어 있다. 혈연과 지연·학연, 중앙과 지방을 구분 짓기에 익숙한 현재의 우리로서는 찬찬히 되씹어 봐야 할 화두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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