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9B0101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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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경상북도 고령군 쌍림면 합가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정동락 |
[영남 사림의 정신적 고향, ‘개실’]
고령군 쌍림면 합가1리 개실마을은 선산김씨[일선김씨]들이 모여 사는 전통 한옥 마을 집성촌이다. 이 마을은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戊午士禍) 때 화를 당한 영남 사림파의 종조인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1431~1492]의 후손이 17세기 중반에 정착한 이후 지금까지 350여 년간 대를 이어 오고 있는 곳이다. 이런 연유로 개실마을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전통 마을이자 조선 시대 영남 사림의 정신적인 고향이며 도학과 선비 정신의 본향으로 꼽힌다. 2000년대로 들어오면서 역사적 전통과 정신을 계승하고 후세에 전승하기 위한 농촌 체험 마을로 거듭 태어나고 있다.
개실마을의 공식적인 행정 구역 명칭은 ‘합가1리’이다. 하지만 이 마을은 ‘합가1리’보다는 ‘개실마을’로 더 널리 알려져 있다. ‘개실마을’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유래가 전해 온다.
첫째는 무오사화 때 화를 입은 김종직의 5세손이 1651년(효종 2)경 이 마을로 피신 와서 은거하며 살 때, 꽃이 피고 골이 아름다워 아름다울 가(佳), 골 곡(谷) 자를 써서 ‘가곡(佳谷)’이라 했다고 한다. 또 꽃이 피는 아름다운 골이라 하며 ‘개화실(開花室)’이라고도 했는데, 그 후 음이 변해 개화실이 ‘개애실’이 되고 다시 ‘개실’로 되었다는 것이다. 즉, 가곡·개화실→개애실→개실로 정착되었다는 얘기다.
둘째는, 원래 이 지역은 대가야국의 이름을 따서 가야곡(伽倻谷)이라고도 했으나, 훗날 이 가야곡이 음이 변해 ‘가야실’, 또는 ‘개애실’이 되었다가 윗마을인 상가(上伽)와 아랫마을인 하가(下伽)를 합해 합가(合伽)가 되었다고 한다. 즉, 가야곡→가야실→개애실→개실로 되었고, 상가와 하가를 통합하여 합가로 정착되었다는 것이다.
[조선 시대 ‘개실’의 공식 명칭은 ‘가야곡’]
점필재 종택 에는 현재의 호적등본과 유사한 성격의 호구단자(戶口單子)가 30여 점 정도 전해 오고 있다. 그 중 1669년(현종 10)에 작성된 김종직의 6세손 김이(金彛)의 호구단자에는 ‘고령현 서면 용계 하동리(高靈縣 西面 用溪 下洞里)’로 기록되었다.
그리고 1729년에 작성된 김종직의 8세손인 김세명(金世鳴)의 호구단자에는 ‘고령현 서면 하동방 하가야곡리(高靈縣 西面 下洞坊 下伽倻谷里)’로 등장한다. 그 후 19세기까지의 호구단자에는 지속적으로 ‘하가야곡’이란 지명이 기록되어 있다. 이를 통해 개실마을은 1600년대인 17세기까지는 ‘하동리’로, 1700년대인 18세기에 들어와서는 ‘하가야곡리’로 불렸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다가 일제 강점기인 1914년에 상가야곡과 하가야곡을 합하여 ‘합가’로 바뀌었다.
이처럼 개실마을의 조선 시대 공식 명칭은 ‘가야곡’이었으며, ‘가야골’과 ‘가야실’ 등으로도 불렸을 것이다. 따라서 ‘개실’이란 이름은 대가야국과 관련하여 붙여졌던 ‘가야곡’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는 것이 맞을 듯하다. 김종직 가문이 이곳에 정착한 이후에도 줄곧 그렇게 불렸을 것이다.
그러니까 ‘가곡’이나 ‘개화실’이라는 명칭은, 아마도 김종직의 후손들이 자신의 가문을 강조하면서 붙인 것으로 보인다. 즉, ‘개실’마을은 조선 시대 공식적으로 ‘가야곡’이라 불렸지만, 김종직의 후손들이 자신들의 가문을 내세우기 위해 ‘가곡’으로 불렀다고 하겠다. 현재 개실마을 주민들이 마을을 방문하는 관광객들에게 대가야국에서 유래된 개실마을보다는 가곡·개화실에서 변이된 개실마을이란 유래를 설명해 주는 것도 그와 같은 연유일 것이다.
[개실마을에는 언제부터 사람들이 살기 시작했을까?]
개실마을에 언제부터 사람들이 살기 시작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다만, 인근에 위치한 쌍림면 매촌리에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어, 청동기 시대부터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대가야 시대에는 이 일대가 토기를 생산하던 중심지 중의 한 곳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마을 뒤편 화개산(花開山)에서 서쪽으로 뻗어 내린 나지막한 가지 능선의 끝자락에 대규모 토기 요지가 있기 때문이다.
또, 화개산 일대는 대가야 시대의 토기편이 널리 분포하고 있는 유물 산포지다. 따라서 대가야 시대의 개실마을은 토기를 만들던 전문 장인들이 많이 모여 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토기를 생산하던 전통은 면면히 계승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개실마을 인근에 조선 시대 분청사기와 백자를 생산하던 자기 요지, 근대의 옹기 가마터가 분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개실마을은 주변의 유적 현황으로 보아 대가야 시대에서 조선 시대를 거쳐 근대에 이르기까지 토기와 자기, 옹기의 생산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던 곳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개실마을을 부흥시키고 역사의 전면에 부상하게 된 것은 김종직의 후손들이 이곳에 정착하면서부터였다.
선산김씨의 세거지는 원래 선산 지역이었다. 그러다가 김종직의 아버지 김숙자(金叔滋)가 선산을 떠나 밀양으로 옮긴 이후 밀양에서 거주하였다. 이후 김종직 가문이 개실마을에 정착하게 된 것은 1651년(효종 2)경 김종직의 5세손인 김수휘(金受徽) 때부터다.
김수희가 고령으로 옮길 수 있었던 것은 증조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고령 지역에 거주하던 가문과 혼인을 했기 때문이었다. 즉, 김수휘의 증조할아버지 김유는 고령 하거리에 세거하던 양천최씨, 아버지 김성율(金聲律)은 도진리에 세거하던 고령박씨와 혼인하고 토지와 노비를 상속받았다. 당시는 성리학적인 예학과 보학(譜學)이 완전히 정착되기 이전이었기 때문에 자녀 균분 상속의 원칙에 따라 처가로부터 재산을 상속받을 수 있었다. 이후 김종직 가문은 국가적인 배려로 관직에 진출하면서 고령 지역에서의 재지적인 기반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에 따라 개실마을은 선산김씨의 집성촌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으며, 그 전통이 오늘에까지 이어지며 점필재 종택을 중심으로 조선 성리학의 연원으로 자리 매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