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9A0101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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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경상북도 고령군 대가야읍 연조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정동락 |
[연조문(延詔門)에서 기원한 이름, 연조]
대가야읍 연조리의 ‘연조(延詔)’는 1914년 대가야읍내에 있던 동부동(東阜洞)과 봉두동(鳳頭洞)을 합해 ‘연조리’라 이름 하면서 처음 생긴 지명이다.
하지만 ‘연조’라는 이름의 기원은 지금으로부터 1600년 전 연조리가 대가야의 도읍이 되고, 이곳에 왕궁이 만들어지는 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연조’는 대가야국 시절 국왕이 조서를 반포할 때 붙이던 게시판인 조서문이 있는 곳에서 기원한 이름이기 때문이다.
대가야읍은 시가지의 서쪽에 위치한 진산(鎭山)인 주산(主山)을 배경으로 동향을 하고 있는 고을이다. 그리고 연조리 일대는 대가야읍의 중심지로서 가장 좋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연조리는 대구 방면에서 국도를 따라 대가야읍내로 들어오면 북쪽 방면에 위치하고 있는 마을이다. 서쪽에는 주산의 능선이 길게 감싸 안고 있으며, 북쪽에는 우륵기념탑이, 동쪽으로는 대가야읍에서 운수면 방향으로 난 국도 33호선이 지나가고, 남쪽에 고령향교가 위치해 있다.
2009년에는 연조리 마을 서편으로 주산의 산록을 따라 남쪽의 고령향교에서 북쪽의 우륵기념탑 앞부분까지 도시순환도로가 개설되었다.
연조리는 마치 갈비뼈처럼 흘러 내려와 있는 주산의 다섯 군데 능선 사이의 골짜기 아래쪽에 집중적으로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그 중 가장 큰 골짜기는 가야아파트가 위치한 뒤편의 봉덕골이다. 연조리는 연조1리에서 연조3리까지 모두 세 개의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다. 자연마을로는 봉두골과 인줄·연조·동배 등 네 개가 있는데, 봉두골은 연조2리로 가야아파트 부근, 인줄은 대가야읍사무소 뒤편, 연조는 고령향교의 북편, 동배는 관음사 부근에 위치해 있다.
연조리의 주요 건물들로는 남쪽에 주산에서 내려온 능선의 끝부분, 대가야 시대 궁성 터라고 전하는 자리에 고령향교가 위치한다. 고령향교와 접해 고령군보건소가 자리 잡고 있고, 연조리를 가로 지르는 도시순환도로를 따라 아파트가 줄지어 늘어서 있다.
즉, 주산빌라와 가야아파트, 가야빌라가 위치해 있고 그 북쪽에 관음사와 수정아파트 등이 자리 잡고 있다. 그 중 가야아파트는 1983년에 대가야읍에서는 가장 먼저 준공되었다. 수정아파트 맞은편에는 고령초등학교가 있고, 그 북쪽에는 고령고등학교가 위치한다.
이처럼 연조리는 대가야읍내의 중심가로 고령 지역에서 가장 많은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있다. 또 고령초등학교와 고령고등학교 등의 학교가 위치한 교육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그 외에도 대가야교육원, 고령군민독서실, 고령경로당, 고령군 노인회관 등 사회 복지 시설들이 밀집해 있기도 하다.
[대가야 궁성이 자리 잡다]
연조리에 사람이 처음 살기 시작한 것은 청동기 시대부터였다. 이후 삼한 시대를 거쳐 400년대 초가 되면서 대가야의 도읍지가 되었다.
고령 지역에는 처음에 양전동 암각화가 있는 개진면 양전리 일대를 중심으로 반로국(半路國)이라는 작은 나라가 활동하고 있었다. 이 반로국이 점차 커져서 대가야로 발전하면서 나라의 중심지가 대가야읍 연조리 일대로 이동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대가야의 왕족과 귀족들의 무덤인 지산동 고분군이 조성되기 시작했다.
이처럼 대가야읍 일대에 자리 잡은 대가야의 최고 지배층이 머물렀던 곳이 바로 연조리에 위치한 대가야 궁성 터다. 이후 대가야는 이 궁성 터를 중심으로 562년까지 그 역사를 가꾸어 나왔다.
대가야 시대의 궁성이 어떤 모습이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대가야 궁성의 성문으로 전단문(栴檀門) 혹은 전단량(栴檀梁)이 있었다고 전한다. 이로 보아 왕궁을 방어하기 위한 성곽과 성문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 전단량을 설명하면서 “전단량은 성문의 이름인데 대가야 말로 문(門)을 양(梁)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양’은 ‘문’의 대가야 사투리라는 것이다. ‘양(梁)’은 일반적으로 ‘교량, 다리, 들보’를 의미한다. 고대 사회에서는 거주하는 곳의 방어를 위해 성곽 주변에 커다란 도랑인 해자(垓字)를 파고 그 속에 물을 채우는 경우가 많았다. 그 때문에 성문은 교량의 형태를 띨 수밖에 없었다. 대가야 사람들이 ‘문’을 ‘양’으로 불렀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대가야는 궁성을 방어하기 위해 주변에 성곽을 만들었고, 전단문은 해자를 건너다니기 위한 교량의 형태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조서를 반포했던 조서문은 어디에 있었을까?]
대가야 시대 사람들은 연조리라는 이름의 기원이 된 조서문을 전단문 옆에 세워 놓고 왕이 선포했던 각종 조서와 명령들을 백성들에게 전달했던 것은 아닐까 생각된다. 현재 대가야읍의 공영주차장에서 고령보건소로 올라가는 길을 ‘구신거리’라고 한다. 또 구신거리에는 구신나무라고 전해지는 보호수로 지정된 느티나무가 있다. 어쩌면 이 주변에 전단문이 있고, 그 옆에 조서문이 서 있었던 것은 아닐까?
562년 9월 대가야는 신라 진흥왕의 명을 받은 이사부(異斯夫)와 사다함(斯多含)의 공격을 받아 결국 멸망하고 말았다. 아마 그 과정에서 궁궐을 비롯한 여러 건물과 조서문도 불타 버렸을 것이다. 더 이상 왕조의 도읍이 되지 못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것이다.
현재 대가야 궁성 터에서는 궁궐을 비롯한 각종 관아가 즐비했을 옛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다만, 그 자리에는 고령향교가 들어서 있고, 고령향교 오른쪽 옆에 ‘대가야국성지비(大伽倻國城址碑)’가 세워져 있을 따름이다.
하지만 대가야 멸망 이후에도 연조리는 고려와 조선 시대를 지나 현재에 이르기까지 고령 지역의 중심지로 제 역할을 다하고 있다. 대가야 궁성 터에서 뛰어 다니는 어린아이들의 웃음 속에서 대가야의 궁성이 있던 연조리의 옛 영광이 되살아나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