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90136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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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婚禮 |
영어의미역 | Marriage Ceremony |
분야 | 생활·민속/민속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북도 고령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창언 |
[정의]
경상북도 고령 지역에서 이루어지는 혼인에 따르는 모든 의례와 절차.
[개설]
일생의례 중에서도 혼인은 ‘대사(大事)친다’는 말이 있듯이 중대한 행사 중의 하나였다. 혼례는 음양의 상생, 곧 성적 이분법의 합일을 추구하는 전형적인 의례이다. 혼인의 어원을 찾아보면, ‘혼(婚)’은 원래 ‘혼(昏)’으로서 해가 진 후에 예를 치른다는 뜻이고, ‘인(姻)’은 여자가 남자로 말미암아 성례한다는 뜻이다. 전통혼례의 절차를 이를 때 의혼(議婚), 납채(納采), 납폐(納幣), 친영(親迎) 등의 순서로 간단하나, 사실은 거기에 따른 부수적인 절차가 복잡하고 격식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의혼이라 함은 혼례의 첫 단계로서, 글자 그대로 혼인을 상의하는 일이다. 주로 중매인이 양가를 왕래하면서 의사를 전달하고 권유하여 성혼이 되게 하는 의식이다. 납채는 성혼이 합의되면 신랑 집에서 신랑의 생년·월·일·시를 적은 사주단자를 신부 집에 보내어 혼인을 구하는 절차이다. 이것이 이루어지면 다시 신부 집에서 신랑가로 택일단자를 보내게 되는데, 이를 연길(涓吉)이라고 한다.
납폐는 사주단자의 교환이 끝난 후 정혼이 이루어진 증거로 신랑 집에서 신부 집으로 예물을 보내는 의식으로, 함보내기라고도 한다. 친영은 신랑이 신부를 맞이하기 위하여 신부가로 장가를 가는 절차를 말한다. 대개 3일쯤 신랑이 신부 집에 묵고 난 후에 신부를 데리고 오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신부가 신랑가로 오는 것을 신행(新行)이라고 한다.
[송곡리 삼동마을의 전통혼례 절차]
경상북도 고령군 다산면 송곡리 삼동마을에서는 1970년대까지 전통혼례가 행해졌다. 여기에서는 이를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1. 의혼과 사성
혼사는 중매인을 통해 혼기가 찬 자식에게 마땅한 배우자가 있는지를 알아보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중매인의 주선이 이루어진 뒤 양가 부모들의 의견이 맞으면 먼저 신랑 집에서 신부 집으로 ‘사성(四星)[사주단자]’이라 불리는 편지를 보내게 되고, 이후 신부 집에서 이에 대한 답신을 한다.
2. 대례 거행
혼례일이 되면 신랑과 신랑의 아버지가 신부 집으로 가는데, 신부 집에는 마당에 천막을 치고 병풍을 둘러 예식장을 만들었다. 혼례상 준비는 양가에서 공동으로 준비하며, 상 위에는 수탉과 암탉 한 마리, 피문어, 가오리, 명태 등이 올라갔다. 혼례상 옆에는 호리병에 대나무를 꽂아 청실홍실을 엮어 두었고, 찬물과 술잔을 올려놓은 작은 상도 있었다. 중앙에서 혼례를 집례하는 사람을 ‘홀개’라고 하는데, 이 사람의 주관에 의해 혼례가 진행되었다.
혼례의 가장 처음은 ‘북향재배’이며, 집례자가 ‘주인면전문어’라고 외치면 신부의 아버지가 신부를 데리고 나왔다. 이후 신랑과 신부는 두 번의 절을 마치는데, 이를 대례라고 한다. 대례를 마치면 신랑은 사랑방으로 가고, 신부는 자기의 방으로 들어간다. 신랑은 사랑방에서 마을 어른들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며 됨됨이를 평가받았다.
3. 신방 엿보기와 신랑 다루기
밤이 되면 신부는 야물상을 차려 신랑이 있는 방으로 간다. 이때 마을 젊은이들은 신방을 차린 문에 구멍을 뚫고 ‘신방 엿보기’를 한다. 혼례 다음 날에는 마을 젊은이들이 신랑을 달아내 놓고 마른 명태로 발바닥을 때렸는데, 이것을 ‘신랑 다루기’라고 한다.
4. 인견과 해 묵히기
대개의 경우 신랑은 3일 동안 신부 집에 머물다가 자기 집으로 돌아간다. 만약 신랑이 3일 만에 집으로 돌아가지 않을 경우 신부의 친척집에서 하루 밤을 묵어야 하는데, 이것을 ‘인견’이라고 불렀다. 인견 후에는 신랑이 다시 3일 동안 신부 집에서 묵을 수 있었다. 이후 신랑은 자기 집으로 돌아가고, 신부는 친정집에서 1년을 더 보냈는데, 이를 ‘해를 묵힌다.’라고 했다. 신부는 해를 묵히는 동안 길쌈을 하여 시부모 이불과 시집가서 쓸 이불, 시부모 한복, 남편 옷과 자기 옷을 만들었다.
5. 밀밭 매러 오기와 시집으로 가기
해를 묵히는 기간 중 신랑은 두세 달에 한 번 정도 처가에 들르는데, 신랑이 여름에 오는 것을 ‘밀밭 매러 온다.’고 했다. 여름에는 국수를 많이 먹었기 때문에 신랑이 밀국수를 먹으러 오는 날을 이렇게 불렀다. 이렇게 해를 묵힌 후 신랑 집에서 ‘언제 시집을 오라’는 내용의 편지를 신부 집으로 보냈으며, 신부가 시집을 갈 때는 가마를 타고 갔다. 당시 강 건너에서 오는 사람들은 배를 타고 낙동강을 건넜으며, 시집에 도착하면 신부는 시부모에게 폐백을 올렸다.
[현황]
고령 지역의 전통혼례는 1970년대 중반부터 점차 사라졌으며, 현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대구나 고령의 예식장에서 혼례를 치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