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900388 |
---|---|
한자 | 德谷面三-一萬歲示威 |
영어의미역 | Independence Movement in Deokgok-myeon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북도 고령군 덕곡면 원송리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일수 |
성격 | 독립운동 |
---|---|
발생(시작)연도/일시 | 1919년 3월 29일 |
종결연도/일시 | 1919년 3월 29일 |
발생(시작)장소 | 경상북도 고령군 덕곡면 원송리 |
관련인물/단체 | 배기석 |
[정의]
1919년 3월 29일 경상북도 고령군 덕곡면 원송리에서 일어난 만세 시위.
[역사적 배경]
3·1운동은 국내외의 긴박한 정세에서 발생의 배경을 찾을 수 있다. 1914년 일어난 제1차 세계 대전과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변화된 세계정세는 민족 문제에 대한 자각을 높이고 한반도를 비롯한 피압박 약소민족의 해방을 고무시켰다. 1918년 1월 제1차 세계 대전을 마무리하는 원칙으로 미국 윌슨 대통령이 내걸은 민족 자결 주의도 식민지 피억압 민족에게 독립의 기운을 불어넣었다.
일제는 강제적으로 한국을 식민지로 만든 뒤 ‘군사적 제국주의’ 차원의 폭력성이 내포된 무단 통치를 실시하였다. 일제는 식민지 수탈 구조의 구축 작업을 추진하였는데, 먼저 식민지 조선의 금융 지배를 위해 화폐 정리 사업을 착수하였다. 근대적 운송망의 구축 역시 일제가 일찍부터 착수한 것인데, 경부선 철도의 부설이 그것이다. 이에 고령은 낙동강 수운을 통한 경제 활동에 타격을 입게 되었다.
또 일제는 토지 조사 사업을 실시해 일제 자본의 자유로운 농촌 침투와 그 지배를 실행하였다. 이 과정에서 고령 지역의 많은 토지 소유권이 일제로 바뀌는 결과를 낳음과 동시에 식민지 지주제가 관철되는 계기가 되었다. 일제는 이런 정책의 온전한 수행을 위해 모든 행정력과 경찰력을 동원하였다. 그 과정에서 일제의 폭압성과 강제력이 자행되어 지역민은 수탈과 지배를 받는 고통을 겪게 되었다.
[발단]
3·1운동 만세 시위가 전국으로 번져 나갈 때, 고령군 덕곡면 원송리에서는 3월 29일 면사무소에서 뽕나무 묘목을 손질하기 위해 면민을 동원하는 일이 있었다. 뽕나무 육성은 일제의 농업 정책의 차원에서 강제적으로 추진되는 일이었다. 일제는 쌀농사에 중점을 두면서도 면화와 제사업의 육성도 정책적으로 추진하였다. 그에 따라 농민들의 고통은 더욱 가중되었다.
[경과]
덕곡면 3·1 만세시위는 3월 29일 면사무소 주도로 뽕나무 묘목을 손질하던 중 동원에 나온 고령군 덕곡면 원송리에 사는 배기석(裵基奭)이 면민 20여 명이 지켜보는 앞에서 만세 시위를 펼치면서 시작하였고, 면민들이 이에 호응하면서 이루어졌다. 이에 덕곡주재소 소속 경찰들이 출동하여 면민들은 해산되었고, 배기석은 검거되었다.
[의의와 평가]
덕곡면 3·1 만세시위는 고령 지역에서 두 번째로 일어난 만세 운동으로서 역사적 의의를 갖는다. 다만, 만세 시위가 조직적이거나 계획적이지 못해 운동의 영향력이 크지는 못하였다. 그렇지만 이후 고령 지역에서 만세 시위운동이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