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9003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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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古代 |
영어의미역 | Ancient Age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북도 고령군 |
시대 | 고대/초기 국가 시대,고대/삼국 시대 |
집필자 | 이형기 |
[정의]
기원 전후부터 7세기 중엽까지 고령 지역의 역사.
[개설]
중국의 『삼국지(三國志)』에 기록된 3세기 경상도 지역은 변한·진한으로 구분되어 있었으며, 여기에 각각 12개의 소국(小國)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와 더불어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그보다 많은 소국들이 등장하며, 이들은 주변 소국들과의 경쟁을 통해 성장하였다. 한국 고대 사회는 이러한 소국들이 주변 소국들을 병합하면서 영역을 확대하고, 그 영역의 지배를 위해 통치 체제를 정비하는 과정을 통해 성장하고 발전하였다.
[지역 연맹체시대]
고대 고령 지역에는 『삼국지』에 등장하는 반로국(半路國)이 있었다. 변한에 속해 있던 반로국은 기원을 전후한 시기 현재의 개진면 반운리를 중심으로 해서 성립한 소국으로, 국의 최고 지배자였던 주수 아래 호민, 하호, 노비 등의 신분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후 4세기 무렵 가야 지역에는 낙랑군·대방군과의 교역을 통해 성장해 가던 김해의 구야국(狗邪國)이 두 군의 축출로 교역의 구심점이 사라지자, 관문 사회의 역할로서 일정하게 작용할 수 있었던 영향력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두 군은 당시 변한에게는 중요한 교역국이면서 선진 문물을 전해 주는 창구 역할을 했기 때문에 이의 소멸은 큰 혼란을 초래했는데, 이러한 상황은 내륙 지역에 위치한 반로국이 내재적인 발전을 가속화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그리하여 3세기 후반경 내재적인 발전 과정 속에서 지금의 고령군 우곡면 일대인 신복현과 합천 야로 지역인 적화현을 통합하면서 ‘가야’라는 지역 연맹체를 구성하게 되었다.
[삼국시대]
5세기 들어 광개토왕의 고구려 남정은 경상남도의 해안 지대뿐만 아니라 가야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이는 5세기에 들어 고령 지역의 정치 집단이 가야사의 전면에 부각되는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6세기 들어 고구려가 남하 정책을 취하면서 신라와 백제 사이에 우호 관계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이 무렵 신라는 종래의 왕호인 마립간을 ‘왕(王)’으로 개칭하고 국호를 확정한 후 대외적으로 팽창 정책을 재개하였다. 이어 법흥왕 대에 율령을 반포하고 공복을 제정하는 등 완전한 중앙 집권 국가 체제를 갖추었다.
백제는 개로왕이 고구려군에 의해 전사한 이후 실추된 왕권을 동성왕[479~501] 대에 만회하고 정국이 안정되었다. 이를 계기로 가야에 대해 적극적인 행동을 취하기 시작하여 주도권을 장악하려 하였다. 이에 위기를 느낀 대가야는 법흥왕 9년 3월 신라 왕실에 청혼을 하였고, 이에 신라 왕실에서는 이찬 비조부의 누이동생을 대가야로 보냈다. 이때 대가야의 왕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보이듯 이뇌왕(異腦王)이었으며, 그 사이에서 월광태자가 태어났다.
400년에 대가야는 고구려군의 남정 이후 급격한 사회 발전을 이루게 되었고, 내부적으로는 중·후엽 즈음 부 체제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한 모습을 잘 나타내 주는 것이 고령 지산동 고분군이다. 지산동 30호분에서는 금동관을 착장한 자까지 순장을 시킬 수 있음이 확인되었다. 또한 주석실 개석과 하부 석곽의 개석에서 암각화가 발견된 데서도 알 수 있듯 기왕의 신앙 체계가 필요하지 않았음을 짐작하게 해 준다.
기왕의 신앙 체계를 무너뜨릴 수 있는 신분의 존재는 신성한 이의 존재를 추정하게 하는데, 이는 곧 초월적인 신분, 즉 ‘왕’이 등장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는 곧 새로운 단계로의 질적인 변화 가능성을 보여 주는 것으로, 대가야 지역 연맹체는 지산동 30호분이 축조되는 시기인 5세기 4분의 2분기에서 479년 어느 시기엔가 부 체제 단계에 접어들었으며, 이때부터 ‘대가야’로 불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대가야의 발전 원동력은 철을 이용해서 만든 군사력을 통한 강력한 정치 체제 형성과 철을 바탕으로 한 교역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와 더불어 고구려군의 남정으로 인한 전화를 전혀 입지 않아 기왕에 4세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하는 내재적인 발전이 지속될 수 있었다. 또한 4세기 후반 들어 진행된 백제와의 교류로 선진 문물을 접하게 되면서 성장에 가속도가 붙었을 것이다. 발전한 대가야를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사건인 479년 남제로의 사신 파견 역시 백제와의 협력이 있었기에 가능했으리라 여겨진다.
대가야는 고령 지역을 중심으로 서서히 발전을 하다가 5세기 이후 급격한 발전을 이루었지만, 6세기 중엽 신라에 의해 멸망을 당하였다. 대가야의 멸망은 곧 가야 사회가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졌다는 의미를 지닌다. 대가야가 멸망한 원인으로는 대가야가 영향권 내의 국가들을 효과적으로 통제하지 못했다는 사실과, 대가야가 가지고 있는 지리적인 폐쇄성 및 철에서 금·은 등 교역 물품의 변화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하여 교역의 주도권을 장악하지 못함으로써 국제 사회에서의 위상을 지속적으로 유지하지 못한 점 등을 들 수 있다.
[남북국시대]
대가야의 멸망 이후 고령 지역은 신라의 영토로 재편되었다. 『삼국사기(三國史記)』를 통해 신라에 멸망된 직후 고령군 지역은 대가야군(大加耶郡)이 되었으며, 적화촌(赤火村)과 가시혜성(加尸兮城)을 예속하고 있었다. 신라의 행정구역 편성에 있어 고령은 과거 대가야국의 직접 지배 영역 전부를 대가야군으로 편제하지 않고, 대가야군의 영역을 축소·조정하여 대가야 중심 지배 세력의 약화를 도모하였다. 그리고 강제 사민을 통해 대가야국 주민 집단의 규모를 축소하고, 공동체적 관계를 해체함으로써 대가야 고지에 대한 신라의 원활한 지배책을 도모하였다.
685년(신문왕 5)에 통일신라의 지방 지배 체제를 9주 5소경 체제로 정비하였다. 이때 말단의 지방 행정 단위로서 현제를 전국가적 범위에서 전면적으로 시행하게 되었다. 현제의 시행과 더불어 신라는 모든 성[촌]을 일정 기준의 전정(田丁)과 호구(戶口)를 갖춘 지역 단위를 선별적으로 현으로 개칭하였던 것이다.
이때 고령군의 적화촌과 가시혜성도 각각 적화현과 가시혜현으로 재편되었고 대가야군에는 군태수, 적화현과 가시혜현에는 현령(縣令)이 파견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군태수와 현령 등 지방관의 아래에는 읍사(邑司)가 구성되어 고령 지역 재지 유력자가 촌주로 임명되어 읍사에 참여하여 통치 업무를 보좌하였다.
이후 757년(경덕왕 16)에 왕권과 중앙 집권 체제의 강화를 위하여 모든 제도의 명칭을 중국식으로 바꾸는 한화정책(漢化政策)을 적극 추진하였다. 이때 전국의 주군현 명칭을 한식으로 개정하였는데 대가야군은 고령군(高靈郡)으로 개명되었고, 적화현은 야로현(冶爐縣)으로, 가시혜현은 신복현(新復縣)으로 함께 개명되었다. 고령이라는 지명은 이때 처음으로 등장한 것인데, 고령이라는 명칭은 이후 읍격의 변화와는 무관하게 이 지역을 지칭하는 지명으로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어 경덕왕 대의 지명 개정은 고령 지역에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