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9C0102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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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경상북도 고령군 우곡면 도진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정동락 |
도진리는 충과 효를 실천한 고령박씨 세거지다. 고려 후기부터 지금까지 650여 년에 이르는 도진리의 역사는 고령박씨 인물들의 충절과 효열의 역사로 점철되어 있다. 도진리의 입향조 박경(朴景)을 비롯해 그 뒤를 이은 박윤(朴潤)·박택(朴澤) 형제의 효, 박정완(朴廷琬)·박정번(朴廷璠) 형제의 충은 고령박씨 문중의 전통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도진의 고령박씨들은 가정 내에서는 효를 백행의 근본으로 삼아 부모를 모실 때에는 지극한 효를 다하는 사친지효(事親至孝)와 돌아가신 후에는 3년간 시묘를 실천하는 거려삼년(居廬三年)을 하였고, 부모가 병이 들었을 때는 손가락을 잘라 피를 수혈해 간병하는 단지진혈(斷指進血)로 도리를 다하였다. 또 효열의 연장으로 나라에 국난이 있을 때마다 의병을 일으켜 충을 다하는 거의진충(擧義盡忠)의 책무를 마다하지 않았다. 또, 태평성대에는 서당을 열어 후학을 양성하고, 당대의 여러 성리학자들과 교유하면서 성리학을 연마하고 시를 읊으면서 음풍농월(吟風弄月)에 몰두하기도 했다.
[도진리의 과거 급제자들]
도진리의 과거 급제자는 문과 네 명, 무과 여덟 명 등 열두 명에 이른다. 문과 급제자는 박광선(朴光先)·박종주(朴宗冑)·박종윤(朴宗胤)·박경구(朴慶九) 등이며, 무과 급제자는 박승노(朴承老)·박형(朴炯)·박계조(朴繼祖)·박흡(朴洽)·박일(朴溢)·박망지(朴望之)·박경덕(朴慶悳)·박철원(朴哲源) 등이다. 그 외 소과 급제자와 천거·문음 등으로 관직에 진출한 인물들도 상당수 있었다. 도진리의 고령박씨들이 문·무과에 고르게 등제(登第)한 것은 이들이 문무를 겸비하는 학풍을 지니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이러한 가문적인 배경이 국가가위난을 당할 때마다 의병 활동을 전개한 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도진리 고령박씨 문·무과 급제자(세대는 중시조인 박환(朴環)을 기준. 1~4번까지는 문과, 5~12번까지는 무과 등제자)[도진리 문인(文人)들이 남긴 문집들]
성리학 연구와 도의를 숭상한 도진리의 고령박씨들은 많은 문집을 남겼다. 죽연 박윤(朴潤)을 비롯해 박정번(朴廷璠), 박원갑(朴元甲), 박응형(朴應衡), 박세정(朴世貞), 박이곤(朴履坤), 박민국(朴敏國), 박경오(朴慶五), 박승원(朴升源), 박문국(朴文國), 박경가(朴慶家), 박태원(朴太源), 박영순(朴英舜), 박돈(朴燉), 박기열(朴璣烈) 등 열다섯 명이 남긴 문집들은 조선 시대 성리학의 기본 정신을 정립시키고, 한국 유학의 이념을 집대성한 정신적 보고라고 할 수 있다. 더불어 많은 인물들이 남긴 시문 등의 유묵은 조선 시대 고령 지역의 문학을 풍요롭게 하고 있다. 이들 문집들은 현재 도진충효관에서 전시, 보관하고 있다.
도진리 선현들의 문집들(세대는 중시조인 박환(朴環)을 기준)[효를 실천한 도진리 사람들]
조선은 성리학을 기본 이념으로 하는 양반 사회였다. 특히, 양반 사대부들이 실천한 으뜸 덕목은 효였다. 도진리의 고령박씨들은 충을 효의 연장선상으로 인식하는 충효일본(忠孝一本)을 삶의 근본으로 삼아 실천해 나갔다. 그에 따라 박윤(朴潤)과 박택(朴澤)을 비롯해 박태중(朴泰重)·박섬(朴暹)·박사연(朴師淵) 3대와 박기언(朴基彦)의 효행, 함안조씨(咸安趙氏)·영월엄씨(寧月嚴氏)·순창설씨(淳昌薛氏) 등의 효열부를 배출하였다. 특히, 『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에는 박윤의 효행 내용이 특기되어 있는데, 이로써도 알 수 있듯 고령박씨 인물들의 효열은 조선 사회의 귀감이 되었다. 도진리에서는 마을 입구 도로 변에 있는 문연서원 유허지에 박윤과 함안조씨, 박기언 등의 효행비를 건립하여 이들의 효열을 기리고 있다. 또 영월엄씨와 순창설씨의 효부상을 도진충효관에 전시하여 후세에 모범을 보이고 있다.
도진리 효자와 열부(세대는 중시조인 박환(朴環)을 기준)[정보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