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9B0201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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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경상북도 고령군 쌍림면 합가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정동락 |
[개실마을, ‘고령딸기’ 농사를 선도하다]
개실마을을 비롯해 고령군 쌍림면 일대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딸기 생산 단지로 유명하다. 그 때문에 대구를 비롯한 경상북도 지역의 대도시에서는 ‘고령딸기’란 이름으로 포장되어 판매되고 있는 딸기를 쉽게 찾을 수 있다.
개실마을을 비롯한 쌍림 지역에서 생산되는 딸기는 가야산에서 발원한 안림천 변의 맑은 물과 비옥한 토양에서 친환경적으로 재배하는 것이 큰 특징이다. 특히, 꿀벌로 자연 수정하여 열매를 맺고, 40년에 가까운 딸기 재배 역사에 바탕한 기술력을 자랑한다. 이 때문에 쌍림딸기는 당도가 높고 맛과 향이 뛰어나다고 정평이 나 있다. 이에 1992년부터 일본과 홍콩 등지로 수출을 하기 시작하여, 2001년에는 일본에 120만 달러를 수출하는 등 품질을 인정받고 있다.
2009년도의 경우 고령딸기는 총 267억 원의 매출을 올려 우곡 그린수박과 함께 고령의 대표적인 특산물로 자리매김하였다.
개실마을에서 딸기 하우스 시설 재배를 시작한 것은 1976년부터라고 한다. 당시 12가구가 참여하여 딸기작목반을 결성한 것이 개실마을 딸기 농사의 출발이었다. 고령에서 노지로 딸기 재배를 시작한 것은 1972년부터이고, 1975년 하우스 시설 재배에 성공하였다.
개실마을은 1976년부터 작목반을 결성하고 시설 재배를 시작했으므로 사실상 고령딸기의 선도적 위치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후 1980년대 중반에는 20여 가구 이상이 딸기 농사를 지으면서 딸기 농사의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그러나 2000년대에 들어와서는 10여 가구로 줄어들었고, 2010년 현재는 세 가구만이 농사를 지속하고 있다. 2000년대 이후 급격한 노령화로 농촌 일손이 부족해졌기 때문이다. 또, 개실마을이 농촌 체험 마을로 바뀌면서, 농촌 체험과 관련된 새로운 소득원으로 전환한 것도 크게 작용하였다. 이처럼 개실마을은 현재 딸기 농사를 짓는 농가가 크게 감소했지만, 딸기 수확 체험이 농촌 체험 코스에 포함되면서 ‘고령딸기’를 전국적으로 알리는 선봉 역할을 하고 있다.
[34년간 딸기 농사만을 고집한 ‘딸기 장인’]
2010년 4월 8일에서 11일까지 4일간 고령군의 대표적인 지역 축제인 ‘제6회 대가야체험축제’가 성황리에 개최되었다. 개실마을도 대가야체험축제의 중요한 체험 코스 중 하나인데, 특히 4일 동안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곳은 딸기 수확 체험장으로 활용된 김종수 씨의 딸기 하우스였다.
김종수 씨의 하우스는 모두 네 동으로, 개실마을 서쪽으로 약 500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4일 동안 우리 비닐하우스를 찾은 사람이 400명 이상이었습니다. 손님들이 더 많았으나, 딸기 수량이 적어져 체험하는 사람들의 불만이 생길 것 같아 더 많이 받을 수 없었지요. 하우스가 터져 나갔어요. 하지만 개실마을을 찾아온 손님들에게 고령딸기를 알린다는 생각에 힘든 줄 몰랐습니다.” 김종수 씨의 함박웃음 뒤로 고령딸기에 대한 자부심과 애틋한 사랑이 넘쳤다.
“1976년부터 지금까지 34년간 딸기 농사를 지었습니다. 부수적으로 벼농사나 과수원도 했지만 주는 딸기였지요. 고령에서 나보다 시설 딸기 오래 한 사람 없을 겁니다. 내가 하는 동안은 농사를 제일 많이[오랫동안] 했어요. 오래 했지만, 농사는 잘 못 짓습니다. 맨날[매번] 중간쯤 합니다. 그 동안 애환도 많고 역사도 많지요.”
김종수 씨가 내린 자신의 딸기 농사에 대한 평가이다.
김종수 씨는 1944년에 쌍림면 합가리 120번지에서 태어나, 지금도 같은 집에서 거주하고 있다.
1966년에서 1969년까지 경기도 광주와 이천에서 군 생활을 하고, 제대 후 경기도 오산의 공군부대 내의 식당에서 4년간 일하였다. 이후 1973년 결혼하면서 개실마을로 다시 귀향하였다. 지금까지 7년 정도 타지에서 생활한 것을 빼면 평생을 개실마을에서 살아 온 ‘개실마을 토박이’다.
개실마을로 돌아온 후 김종수 씨는 인근의 매촌리에서 시설 오이를 많이 지어, 처음에는 오이 재배를 계획했으나 일조량이 맞지 않아 포기했다. 개실마을의 대나무를 활용한 하우스 재배를 고민하던 중 1975년 쌍림면 백산리 용담마을에서 이상호 씨가 시설 딸기를 재배하기 시작하자 이듬해인 1976년 이 모종을 받아 개실마을에서 시설 재배를 시작해, 1977년 봄에 수확할 수 있었다.
마을에서는 처음 실패할 것을 염려해 딸기 농사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하지만 젊은 나이로 마을의 혁신을 위해 새로운 농법을 도입할 것을 적극 주장해 마을 사람들을 설득했다. 그리고 자신이 앞장서서 논을 사려고 모아 둔 돈 50만 원을 투자하고 농업협동조합에서 농자금을 대출받아 딸기 모종과 비닐, 대나무 등을 구입할 수 있었다. 이후 김종수 씨의 시설 재배가 괜찮다는 소문이 나자 인근의 안림 지역에서 1970년대 초부터 노지 딸기를 하던 사람들이 시설 재배로 전환하기 시작하였다. 개실마을의 작은 성공이 쌍림면 지역의 딸기 농사가 크게 발전할 수 있도록 계기를 마련해 준 셈이다.
김종수 씨는 처음에는 하우스 4동으로 농사를 시작하였다. 당시는 경지 정리가 되지 않아 논의 형태에 따라 하우스를 제작했는데, 면적은 350평[1157.02㎡] 정도였고, 하우스 길이는 30~60m 내외였다. 1980년대에 들어와 김종수 씨는 하우스를 600평[1983.47㎡] 정도로 규모를 키웠다. 1990년 겨울에 개실마을에 경지 정리가 시작되자 김종수 씨는 쌍림면 귀원리로 이사를 가 1200평[3966.94㎡]으로 농사를 늘였다.
이 해 겨울에는 눈이 많이 와 하우스가 무너지는 등 고생도 참 많이 했다. 1991년 경지 정리가 끝나자 다시 개실마을로 돌아온 김종수 씨는 1200평에 딸기 하우스를 만들었고. 그것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처럼 30년 이상 딸기 농사만을 고집해 온 김종수 씨는 고령딸기의 역사이자 산증인인 셈이다.
[김종수 씨가 이야기 하는 고령 딸기의 역사]
김종수 씨가 처음 농사를 짓기 시작한 1976년부터 현재까지 30여 년간 딸기 농사도 정말 많이 발전하였다. 김종수 씨가 풀어 놓는 이야기를 통해 고령딸기의 변천사를 정리해 본다.
우선, 딸기 하우스를 만드는 재질도 1976년에는 대나무를 이용해서 만들었으나 1982년 즈음부터 8m 길이의 파이프로 차츰 바뀌기 시작하였다. 1987년경에는 10m 파이프, 1991년부터는 12m 길이의 파이프로 하우스를 짓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딸기 종자도 모두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여러 번 바뀌었다. 1976년에는 ‘보교조생종’으로 농사를 짓기 시작했으나, 1985년경에는 ‘여흥’으로 바뀌었다. 그러다가 1990년대 이후 ‘육보’와 ‘장희’로 품종이 교체되었다.
김종수 씨는 이후 20여 년간 육보를 주로 심었다. 현재 고령에서 가장 많이 재배하는 딸기 품종은 ‘육보’와 ‘장희’다. 육보는 원추형에 육질이 단단하고, 장희는 길쭉하고 육질이 무른 편이다. 김종수 씨는 “장희는 내하고 인연이 안 맞아 두 번 심었다가 두 번 모두 실패를 봤어요. 그 뒤로는 장희는 쳐다보지도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2010년부터 고령 지역에서는 ‘설향’으로 딸기 종자를 대체하고 있다. 일본에서 수입한 품종인 육보의 로열티 문제가 제기되면서 국내 종인 설향으로 점차 전환하는 추세이다. 김종수 씨는 “설향도 육질이 좋고 수량도 많아 선택했는데, 빨리 물러지는 단점이 있습니다. 앞으로 좀 더 품종 개량이 이루어졌으면 좋겠습니다.”라고 한다.
딸기의 포장 용기도 1976년에는 나무로 만든 갈치 상자에 8㎏을 담아 1T 트럭으로 서울의 청과물 시장에 판매하였다. 그러다가 청과물 시장이 가락동으로 옮겨진 이후 1984년경부터 8㎏ 스티로폼 상자로 바꾸어 몇 년을 사용했다. 1988년부터는 소형 포장 두 개가 들어가는 1.5㎏ 소포장 종이 상자에 딸기를 포장하였다.
2000년대에 들어와서는 500g이 들어가는 투명 플라스틱 원형 도시락 용기 네 개를 담은 2㎏ 포장으로 바꾸었고, 2010년부터는 4각 투명 플라스틱 도시락 용기로 출하하기 시작했다. 김종수 씨는 2000년대 들어 투명 용기로 딸기 포장 용기를 바꾼 것은 딸기 포장의 투명성을 높이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딸기는 크기에 따라 특등품, 상품, 중품, 하품의 4단계로 선별된다. 그런데 이전에는 위에는 굵은 것, 아래에는 작은 것을 포장하는 경우가 가끔 있었다. 이 때문에 고령딸기의 이미지가 나빠지기도 했다. “고령딸기에 대한 나쁜 이미지를 원상회복하는 데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었습니다. 지금은 고령딸기가 다시 좋은 제품으로 전국적으로 인정받고 이미지도 좋아졌지요. 그 동안 안사람[부인]의 푸념도 있었지만 나는 끝까지 양심적으로 딸기를 선별해 포장했어요. 그 때문에 손해도 좀 보기도 했지만 지금도 후회하지는 않습니다.”라는 김종수 씨의 말에서 ‘딸기 장인’의 정신이 느껴졌다.
그러면 딸기 가격은 어떨까. 1977년 처음 출하할 때 8㎏ 한 상자가 8000원 내외였다. 1988년경에는 1.5㎏ 한 상자가 1만 원 내외, 2000년대에 들어와 2㎏ 한 상자가 2만 5000원 정도 한다. 비닐과 자재 값은 자꾸 오르는데 딸기 값은 10년 전이나 지금이 거의 변화가 없다. 물가 상승 등의 요인들을 고려해야겠지만 처음 농사지을 때와 거의 비슷한 수준인 셈이다.
김종수 씨가 처음 50만 원을 투자해 딸기를 시작한 1977년의 총수입은 108만 원 정도였다. 순수익은 58만 원 정도였는데, 논 300여 평을 구입하고도 돈이 남았다. 그 후로도 벼농사 짓는 것보다는 몇 배의 수익이 들어왔다. 1년에 대략 총수입이 4000만 원 내외였고, 자재비 등을 제외한 순수익은 년 2500만 원 정도 된다고 한다. “평생 딸기 농사를 지어 1남 2녀 키우고 학교 보내고, 딸 둘을 출가시켰어요. 이게 돈 번 거지 따로 큰돈은 못 벌었습니다. 그래도 공무원 퇴직하는 연금만큼은 모아 놓았어요.”
올해로 67세인 김종수 씨는 이제 나이가 많아 딸기 농사가 힘에 부친다고 한다. 그래서 앞으로 딸기 농사를 계속할지 고민 중인데, 일단 내년 한 해만 더 농사를 지어 볼 생각이라고 한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그만두면 개실마을 딸기 수확 체험은 어떻게 될지 걱정부터 한다.
개실마을을 찾는 관광객들에게 한 번쯤 34년의 노하우를 지닌 ‘딸기 장인’ 김종수 씨의 딸기 하우스를 찾아 볼 것을 권한다. 그러면 고령딸기의 역사는 물론 딸기 농사의 비법 한 구절쯤은 전해들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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