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9B0101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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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경상북도 고령군 쌍림면 합가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정동락 |
[집성촌의 타성바지]
이병국[1942년생] 씨를 처음 만난 것은 2009년 7월 개실마을을 방문했을 때였다. 마침 개실마을에서는 마을 행사로 종손을 비롯한 주민들이 출타 중이어서 마을을 안내해 줄 사람이 없었던 같다. 이때 이병국 씨가 마중을 나와 마을 안내를 자청하였다.
처음 수인사를 나눌 때 이병국 씨는 호방한 호인형의 얼굴에 걸걸한 목소리로 “안녕하세요. 나는 개실마을의 김병국입니다. 제가 오늘 여러분들을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하고 자신을 소개했다. 필자는 종손의 존함이 김병식이므로, 아마도 같은 항렬의 선산김씨[일선김씨] 종인(宗人)일 것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전통놀이 체험마당[민속마당]을 비롯해 점필재 종택, 화산재 등 마을 이곳저곳을 안내 받았다.
마을을 둘러보면서 이야기가 무르익자 이병국 씨는 “사실 나는 김병국이 아니라 이병국”이라고 웃으면서 자신을 다시 소개했다. 그러면서 마을 안내를 해 줄 사람이 없어 자신이 나서게 되었는데, 성을 ‘이씨’로 하기보다는 ‘김씨’로 소개하는 것이 좋을 듯해서 ‘김병국’이라고 소개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농담으로 “나는 고지기[일정한 건물이나 물품 따위를 지키고 감시하던 사람]가 아닙니다. 내 본관은 전주이씨인데 개실마을로 장가를 왔고, 증조부 때부터인 1920년대부터 이 마을에 정착하게 되었지요. 우리 집안과 개실마을은 4대 역혼으로 누대에 걸쳐 혼사가 있어요. 고조부의 따님이신 증고모님과 증조부의 따님인 왕고모께서 개실마을로 시집왔고, 부친과 나는 이 마을로 장가를 들었지요. 그 때문에 동네 삽작[경상도 사투리로 대문]만 나서면 외가 아니면 사가[처가 친척들]입니다.” 하면서 호탕하게 웃었다.
2010년 현재 쌍림면 합가1리는 62가구에 158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그 중 개실마을은 52가구에 93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그 중 타성은 이병국 씨 등 이씨가 두 가구, 김씨지만 본관이 선산이 아닌 집안이 두 가구 등 모두 네 가구가 살고 있다. 전체 가구 중 92%가 선산김씨[일선김씨]이고, 나머지 8% 정도가 타성이다. 이처럼 개실마을과 같이 동일한 성씨들이 모여 사는 집성촌을 찾는 사람들은 그 마을 주민 모두가 같은 성씨들일 것이라는 선입견을 가진다. 그 때문에 주요 성씨 이외의 다른 성씨의 사람들을 만나면 그들을 ‘고지기’ 혹은 ‘머슴’ 등으로 오해하는 사례가 종종 있다. 물론 이런 경우가 전혀 없지는 않으나, 타성 중의 상당수는 혼인을 통해 해당 마을에 정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병국 씨도 혼인을 통해 개실마을에 정착한 경우이다.
[증조할아버지 대부터 살아온 마을]
이병국 씨는 고령군 쌍림면 귀원리의 서재골, 즉 현 쌍림초등학교와 쌍림중학교 뒤편 마을에서 태어났다. 선조인 전주이씨들이 귀원리로 이주한 것은 임진왜란 이후인 17세기 전반 양녕대군의 6세손인 이도(李蒤) 때부터였다고 한다. 그 후 이병국 씨의 집안은 350년간 서재골에 정착하였다. 그러다가 1916년 즈음 증조할아버지가 잠시 합천으로 이주했다가 1920년경 다시 고령으로 귀향, 개실마을의 현재 살고 있는 집에 정착하였다.
그리고 1930년경 아버지[이한수]가 개실마을의 선산김씨 집안 딸과 혼인을 하였다. 이후 현재까지 이병국 씨 집안은 개실마을과 인연을 이어 오고 있다.
이병국 씨는 1942년에 태어났으며, 태어난 지 얼마 후 증조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1945년 해방을 맞이했을 때 개실마을에서도 사람들이 모여서 만세를 불렀다고 하는데, 이병국 씨도 어렴풋이 기억난다고 한다. 쌍림초등학교 2학년 때 6·25전쟁을 겪었으며, 이즈음 아버지가 병환으로 타계하였다. 그 후 고령중학교를 거쳐 1958년 대구상업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 당시 대구상업고등학교는 실업계 고등학교로 전국적으로 이름난 명문이었다. 어린 시절 공부는 곧잘 했다고 이병국 씨는 그 대목에서 미소를 지었다.
이병국 씨는 고등학교 졸업 후 1962년 군에 입대했고, 1964년 12월 26일 현재의 부인인 김덕자 씨와 결혼하였다. 전역하기 1개월 전이었다. 원래는 12월 24일에 결혼식이 잡혔으나 날이 좋지 않아 연기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이병국 씨는 2대에 걸쳐 개실마을과 혼인 관계를 맺게 되었다. 이후 이병국 씨는 1969년 한국도로공사에 입사했다가 1981년 퇴사한 뒤 다시 개실마을로 돌아왔다. 당시 축산업으로 한우 사육이 크게 유행하여 소를 키우기 위해 회사를 그만둔 것인데, 지금까지도 잘못된 선택이었다고 이병국 씨는 후회한다고 했다. 한우 농사를 크게 실패하고 1980년대 초 2년 정도 딸기 농사를 짓기도 했는데, 이병국 씨는 1983년과 1984년 즈음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이후 1985년 다시 대구로 나가 제조업체에서 근무하다가 1993년경 솜 공장[백화산업]을 경영하기 시작하였다. 그 뒤 회사를 고령군 다산면으로 옮겼고, 지금은 아들에게 가업을 물려주었다.
[마을이 발전한다면 뭐든 해야죠]
이처럼 이병국 씨의 집안은 1920년 증조할아버지가 개실마을에 터를 잡은 후 현재까지 같은 집에서 대를 이어 김씨 마을 속의 타성인 이씨로 살아오고 있다. 그 동안 이병국 씨는 개실마을에서 살아오면서 흔히 집성촌에서 살아가는 타성들이 겪는 고통 중의 하나인 김씨들의 텃세를 크게 겪지 않았다고 한다. 누대에 걸친 혼인을 통해 묶여진 인연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크게 손해나지 않으면 양보해서 인심을 잃지 않았다고 자부한다는 말처럼, 개실마을을 자신의 고향으로 여기는 마음이 크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현재 개실마을의 전통놀이 체험마당이 있는 곳은 원래 이병국 씨의 문전옥답이 있었던 곳이다. 2001년 개실마을이 아름마을사업 시범마을로 선정되어 전통놀이 체험마당을 조성할 때 내 놓은 것이라고 한다.
이병국 씨는 지금도 체험마당을 볼 때면 가슴이 아프다고 했다. 선대로부터 내려오던 논을 내 놓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네가 발전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후회는 없다. 이병국 씨는 “내 모친이 아직도 개실마을에 살아계십니다. 앞으로도 개실마을의 발전에 도움이 되는 일이 있으면 앞장서 나가도록 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개실마을에 대한 이병국 씨의 애정은 자신의 집을 개축하여 도자기 체험 공방인 ‘도예공방 랑’으로 만든 것에서도 잘 드러난다. 현재 ‘도예공방 랑’은 이병국 씨의 셋째 딸인 이숙랑 씨가 운영하고 있다.
이병국 씨의 2남 3녀 중 셋째 딸인 이숙랑 씨는 도예를 전공하여 외국에 유학을 갔다가 서울에서 공방을 운영했는데, 2008년 아버지의 권유로 개실마을에 정착하게 되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는 셋째 딸을 개실마을로 오게 한 동기는 ‘아름마을 가꾸기 사업’과 연계하면 마을 발전에도 도움이 되고, 이곳에서도 작품 활동을 하는 데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마을에 대한 여간한 애정이 아니면 실천으로 옮기기 어려운 결정이었을 게 틀림없다.
이처럼 이병국 씨는 비록 김씨가 아닌 이씨지만 온전한 개실마을 사람으로 지금껏 살아왔다. 처음 만났을 때 자신을 ‘김병국’으로 소개할 만큼 개실마을에 대한 마음이 남달랐던 이병국 씨의 삶은 이렇듯 셋째 딸을 통해 앞으로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개실마을에서 도자기 만들기 체험을 위해 도예공방 랑을 방문하는 방문객들에게 이병국 씨 부녀의 이야기도 한 번 들어 보기를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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