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9B0101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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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경상북도 고령군 쌍림면 합가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정동락 |
[개실마을의 정신적 지주, 점필재 종택]
쌍림면사무소가 있는 귀원리에서 귀원교를 건너 합천 방향으로 난 국도 33호선을 따라 가다 보면 개실마을이 나온다. 개실마을로 들어가는 진입로에서 곧바로 직진하면 마을 가운데 점필재 종택이 위치한다. 문충공 사당은 종택과 짝을 이루면서 종택의 오른쪽 구릉 위에 별도로 건립되어 있다. 이 종택과 사당이야말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집성촌이자 양반 마을인 개실마을의 중심지이면서 마을 사람들의 정신적 지주이기도 하다.
종택은 한 가문의 구성원들을 결집시켜 주는 구심체로, 외부 사람들에게는 그 가문을 대표하는 상징이다. 사당은 가문의 선조를 모시는 제사 의례의 공간이지만, 종중 구성원들을 화합하고 결속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자손들로 하여금 가문에 대한 내력을 익히고 조상에 대한 경외감과 자부심을 느끼게 하는 교육의 장이기도 하다. 특히, 문충공 사당은 나라에서 공인한 국불천위(國不遷位) 사당이라는 점에서 점필재 김종직 후손들의 자부심은 더욱 높다.
종손은 종택에 거주하면서 사당을 관리하고 조상의 제사를 주관하며, 마을을 찾는 외부 인사들을 접대한다. 대내적으로는 종중의 중요한 의사를 결정하는 역할을 수행하며, 대외적으로는 가문을 대표하는 얼굴이다. 이런 점에서 개실마을의 역사는 종택과 사당을 중심으로 종손들이 대를 이어 이루어 놓은 선산김씨[일선김씨] 가문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종택의 사랑채에 걸린 문충세가(文忠世家)라 쓰인 현판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문구이다.
[점필재 종택과 사당을 둘러보다]
점필재 종택과 문충공 사당은 1651년(효종 2)경 김수휘(金受徽)가 화개산의 주맥 아래에 처음 정착하면서 건립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현재의 종택과 사당은 각각 1787년(정조 11)과 1788년(정조 12)경에 새롭게 중건되었고, 종택의 대청은 1812년(순조 12)에 다시 지어졌다고 한다.
종택의 정면에 위치한 삼문을 들어서면 사랑채가 위치해 있는데, 정면 5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사랑채 뒤에는 안마당을 마주하여 정침[안채]과 좌우에 고방채와 중사랑채가 위치한다. 전체적인 건물의 배치는 ‘튼ㅁ자’ 형을 이룬다. 정침은 정면 8칸·측면 1칸의 맞배지붕이고, 사랑채는 정면 5칸·측면 2칸의 맞배지붕, 고방채는 정면 4칸·측면 1칸의 우진각이다. 사당은 종택의 동편으로 50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이렇게 종택과 사당이 화개산의 주맥 아래에 자리 잡은 후 그 자손들이 주맥과 좌우편의 가지 능선 사이의 골짜기를 중심으로 분가해 나가면서 개실마을은 확장되었다. 현재, 개실마을은 종택을 중심으로 그 앞쪽과 동쪽·서쪽, 특히 서쪽 골짜기에 집들이 다수 건립되어 있다. 특히, 김종직 선생의 7세손에 이르러 분파된 지파에서 각각 건립한 재실을 중심으로 분파가의 가옥들이 대체로 정형을 이루면서 건립되었다.
[개실마을의 주요 건축물들]
도연재(道淵齋) 는 마을 앞 도로에서 종택으로 들어가는 길의 왼쪽에 자리하고 있다. 1866년(고종 3) 김종직의 유업을 기리기 위해 지역 유림이 중심이 되어 정면 5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건립되었다. 그 후 김종직 선생을 향사하면서 지역 유림들의 강학소로 활용되었다. 도연재라는 이름은 김종직 선생이 조선 도학의 연원이라는 뜻을 지닌 도학연원(道學淵源)에서 따왔다.
대청에 있는 「도연재기」는 장석룡(張錫龍)이 찬하였다. 모졸재(慕拙齋)는 종택의 동쪽에 자리하고 있다. 종택 앞에 위치한 체험마당을 따라 동쪽의 왜골 방향으로 가다 보면 마을 모퉁이에 모졸재가 자리하고 있다.
김종직의 7세손인 졸와공(拙窩公) 김시락(金是洛)을 위해 1964년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건립하였다. 모졸재라는 이름은 졸와공을 사모한다는 의미이다.
화산재(花山齋) 는 종택의 서쪽 편에 위치한다. 도연재 옆으로 난 길을 따라 마을 뒤편으로 가다보면 화개산 산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화산재는 정면 6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1838년(헌종 4)에 건립되었다. 원래는 민가의 행랑으로 건축되었으나, 후에 파조인 매암공(梅庵公) 김시사(金是泗)의 재사로 대체되면서 화개산의 지형에서 이름을 따서 화산재라고 했다. 화산재 오른쪽에는 1칸의 맞배지붕인 추원별묘(追遠別廟)가 있어 김시사를 위시한 다섯 분의 위패를 봉안했으나 지금은 없어지고 대신 백원당(百源堂)이라는 건물이 건립되어 있다. 화산재가 전통 혼례장으로 활용되면서 백원당은 신랑과 신부가 폐백을 드리고 하룻밤 묵는 곳으로 이용된다. 마당에는 ‘일선김씨 오세효행사적비’가 세워져 있다.
추우재(追友齋) 는 종택의 서북 편에 위치한다. 합가리 마을회관 옆으로 난 길을 따라 곧장 들어가면 나오는 마을 뒤편의 산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인 추우재는 1949년 오우당공(五友堂公) 김시수(金是洙)를 위해 건립한 재실로, 오우당을 추모한다는 의미이다.
이처럼 개실마을은 점필재 종택과 문충공 사당을 중심으로 도연재·모졸재·화산재·추우재 등의 재실이 건립되어 있는데, 여기서 향사하는 김시락과 김시수·김시사 등 3형제는 김종직의 7세손들이다.
대부분의 가옥들이 전통 한옥의 옛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는 개실마을은 2000년대로 들어와 도연재와 재실을 비롯해 20여 개소의 마을 내 한옥들을 농촌 체험을 위해 방문한 관광객들의 민박집으로 활용하고 있다.
특히, 개실마을을 찾는 도시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것은 마을 안의 흙담길이다. 전통적인 방식으로 진흙과 돌, 기와 등을 이겨서 쌓은 담장, 황토로 만든 벽과 기와지붕, 굴뚝을 타고 모락모락 피어나는 연기가 사뭇 정겹게 다가오는 곳이 바로 개실마을이다.
1980년대의 시대적 풍경을 연상시켰던 한옥집의 흙벽에 쓰인 ‘반공 방첩’이란 낙서가 2010년 가옥을 새로 보수하면서 없어져 버린 것이 아쉬울 만큼 개실마을의 전통 한옥과 돌담길, 거기에 인심 좋고 순박한 마을 주민들의 구수한 웃음이 어우러져서 만들어 내는 정다운 풍경은 도시 생활에 찌든 도시인들에게 옛 고향의 정취를 듬뿍 나눠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