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9B0101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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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경상북도 고령군 쌍림면 합가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정동락 |
[꽃피고 나비 춤추는 형국]
쌍림면 합가리 개실마을은 명당의 조건들을 잘 갖추고 있다. 『일선김씨역대기년』에는 개실마을 입향조인 김종직의 5세손 김수휘(金受徽)가 지형을 살펴보니, “앞산은 접무봉(蝶舞峯), 뒷산은 화개산(花開山)이라 꽃피고 나비 춤추는 형국이라 하여 개화실(開花室)로 부르고, 꽃피는 아름다운 골이라 하여 가곡(佳谷)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실제 개실마을은 뒤로는 화개산에서 뻗어 내린 산록에 기대어 가옥들이 남향을 하고 있고, 마을 앞으로는 둥글게 구불거리며 지나는 물길을 마주한 배산 임수(背山 臨水)의 전형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기 승풍즉산 계수즉지 고위지풍수(氣 乘風則散 界水則止 故謂之風水)”, 즉 “생기(生氣)는 바람을 타고 흩어지고 물을 만나면 멈춘다. 그런 까닭으로 풍수라고 한다.”는 말이 있다. 풍수지리설에서 생기는 산자락을 타고 명당으로 흘러내리지만, 물을 만나면 건너지 못하고 머물게 된다고 한다. 그 때문에 생기를 머물게 하기 위해 뒤로는 생기가 흘러들어 올 수 있는 산이 있고, 앞으로는 생기가 흘러나가지 못하게 강이나 하천이 있는 곳이 길지로 여겨졌다. 이른바 배산 임수의 형국이 이에 해당한다. 또 이러한 지형을 가진 명당이 남향을 하고 있고, 앞에는 나지막한 안산(案山)이 있으면 명당 중의 명당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풍수 지리적 명당은 개실마을의 모습과도 잘 부합한다고 하겠다.
백두대간의 일맥인 가야산에서 미숭산과 만대산의 줄기가 흘러 내려 개실마을의 주산인 화개산[높이 193.8m]을 이룬다. 마을의 왼편으로는 두 줄기의 청룡맥이 감싸 내리고, 오른쪽 편으로는 세 줄기의 백호맥이 감싸 돈다. 마을 앞으로는 안산이 되는 접무봉[높이 186.7m]이 우뚝 솟아 있다.
접무봉은 학자를 많이 배출한다는 문필봉(文筆峰)으로도 불리는데, 개실마을에 학문적인 성취를 이룬 인물들이 많았음을 웅변한다. 이 가문에서는 문과 7인, 은일천거 및 초시 21명을 배출하기도 했다. 다만 접무봉이 비교적 높고 가까워 명당의 입지가 다소 좁은 편이라고 한다.
이처럼 주산인 화개산과 안산인 접무봉이 이루는 산지에 둘러싸여 마을이 펼쳐져 있다. 주산과 안산은 차가운 북풍을 막아 주고 생기가 흩어지지 않게 갈무리해 준다. 마을 앞으로 흘러가는 하천은 금성수(金城水)로 풍수적으로 이상적이라고 한다.
만대산과 노태산의 골짜기에서 발원하여 흐르는 하천은 마을 앞에서 굴곡을 이루며 마치 전통적인 활의 형상처럼 휘어져 흘러내린다. 특히, 마을 사람들이 배꼽마당으로 부르는 곳은 마을 맞은편 쪽으로 움푹 들어가 있어 예사롭지 않다.
이 하천 주변으로는 한밭들, 안산들, 왜골들, 사학골들 등 그리 넓지 않은 들판이 형성되어 있다. 다만 마을 앞으로 가로질러 지나던 예전의 국도 33호선이 마을을 둥글게 안으면서 지나가고 있어 물길의 좋은 점을 반감시키는 단점이 있었다. 그러나 2009년에 새로 생긴 국도 33호선이 하천 건너편에 새롭게 개통되어 이러한 단점들을 극복하게 되었다.
이처럼 개실마을은 화개산과 접무봉이 마을을 감싸 안아 아늑함을 주고, 마을 앞으로 하천이 흘러내리면서 풍요롭고 넉넉한 삶의 터전을 제공해 준다.
봄이면 매화·목련·벚꽃이 지천에 피고, 부드러운 곡선의 하천이 마을을 감싸 흘러내린다. 넉넉한 인심과 역사와 전통을 숭상하는 사림의 고장, 사람과 자연이 어우러진 선비들의 이상향, 개실마을이 바로 그런 곳이다.
[명당의 중심에 입지한 점필재 종택과 사당]
풍수지리적으로 마을의 가장 중요한 곳, 즉 생기가 집중되는 곳인 혈(穴)에는 보통 종가나 입향조의 집이 들어서게 마련이다. 개실마을 역시 명당 중의 명당에 위치한 가옥이 바로 점필재 종택이다. 점필재 종택은 화개산의 중심 맥이 뻗어 내린 곳에 남향으로 자리 잡고 있다.
건물은 본채[안채]가 높고 청룡과 백호에 해당되는 나머지 건물은 낮게 배치되어 있다. 이른바 앞이 낮고 뒤가 높은 전저 후고(前低 後高)의 원칙을 잘 따르고 있다. 또한 건물 가운데에는 마당을 두는 중정형 배치로 좋은 기운이 빠져 나가지 않도록 보존하고 있다. 이러한 건물과 마당의 배치는 산기슭에 위치한 종택의 입지와 연관되어 있다. 즉, 자연 지형을 충분히 활용함으로써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중시한 우리 건축의 전통이 배어 있다. 안채의 안마당과 담장에는 화단을 조성하여 바깥 경치와 종택 내의 화단이 조화를 이루어,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의 심리적 안정감을 높이고 있다.
화개산과 연결되는 종택의 뒤편으로는 개실마을의 역사와 함께 나이를 먹은 대나무 숲이 울창하다. 종택 뒤의 산기슭에서 발생할 수 있는 산사태에 대한 위험 요소를 없애기 위해 심은 것으로 보인다. 더불어 대나무 숲은 집의 풍치를 돋우고 차가운 북풍을 차단하는 기능을 가지기도 한다. 하지만 곧은 절개를 지키는 선비 정신의 상징으로 더 큰 의미가 읽힌다. 2009년 종택과 사당 뒤편의 대나무 숲 일부를 제거했으나, 현재는 다시 대나무가 자라고 있다.
문충공 사당 은 종택 건물에서 오른쪽으로 약 30m 정도 떨어진 구릉 위에 종택과는 별도로 건립되어 있다. 이 사당은 김종직 선생의 불천위(不遷位)[나라에 큰 공훈이 있거나 학문이 뛰어난 인물의 신주를 땅에 묻지 않고 사당에 영구히 모시면서 제사를 지내도록 허락한 신위] 신주를 모신 곳이다.
사당은 종택과 마찬가지로 화개산의 중심 맥이 뻗어 내린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종택과 사당을 화개산의 중심 맥의 좌우측에 배치해 놓은 것이다. 그러면서 사당을 종택의 안채보다 높은 지대에 배치하여 사당의 위격을 높였다.
보통 사당은 안채 뒤편의 높은 대지에 건립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점필재 종택의 경우에는 안채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별도로 건축한 것이 특징이다. 사당은 조선 시대 성리학적 예학과 종법이 정착되면서 종택의 상징적인 건물이 되었다. 특히, 국불천위(國不遷位)[나라에서 공인한 불천위]인 문충공 사당은 개실마을을 찾는 내빈들이 반드시 참례하는 곳이기도 하다.
이렇듯 주산인 화개산과 안산인 접무봉, 하천인 금성수가 이루어 놓은 풍수 지리적 명당에 자리 잡고 있으면서 김종직 선생의 학문과 정신을 오롯이 계승하고 있는 점필재 종택과 마을 사람들의 넉넉하고 후덕한 인심이 합해져서 개실마을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전통 마을로 자리 매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