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9A0302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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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경상북도 고령군 대가야읍 연조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박경용 |
[지산동 고분을 오르며 고령 물산을 전국에 소개한 고령 보부상]
보부상(褓負商)은 등짐, 봇짐을 지고 여러 지역의 시장을 다니면서 물건을 판매하는 상인을 통칭한다. 여느 지역이나 마찬가지로 500년 도읍지 고령에도 보부상은 존재했는데, 그 중에는 연조리 사람들도 있어서 1970년대까지만 해도 농한기마다 등짐과 봇짐을 지고 전국을 돌아 다녔다.
고령 보부상들은 19세기 중후반부터 조직화를 꾀해 1866년에는 좌사계(左社契)를 그리고 30여 년 후인 1899년에는 우사계(右社契)를 각각 결성했다. 이들은 옛 선조들이 낙동강을 따라 바닷길을 열었듯이, 지산동 고분을 오르며 고령의 물산을 전국에 소개했다.
좌사계는 유기나 소금, 새우젓 등 비교적 무거운 물품을 취급하는 등짐장수 중심의 모임이었다. 우사계는 은반지, 비녀, 옷가지 등을 다루는 봇짐장수들로 구성되었다. 보부상은 계 형식의 조직을 통해 정보 교류와 친목 도모 및 상권 보호를 도모해 왔다. 그러한 과정에서 총회를 통해 회비를 걷어서, 역대 반수와 접장을 기리는 대제(大祭)와 시사(時祀)를 지내고, 100여 점에 달하는 각종 관련 문서와 물건 등 보부상 문화를 창조, 전승해 왔다.
이제 고령 보부상은 실제 기능도 상실되었을 뿐만 아니라, 관련자들도 하나둘 자연 사멸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보부상의 문화는 후세인의 노력으로 제사 봉행과 문화재 지정 및 기념관 건립 등을 통해 일부나마 전승되고 있다.
[보부상의 후예와 결혼하다]
연조리에 소재한 노인복지대학 학장인 박점술[1931년생] 씨는 전 좌사계 접장이자 반수였던 남편[고 곽차효]과 더불어 보부상 문화 전승을 위해 노력해 온 이들 중 한 사람이다. 박점술 씨는 결혼부터가 보부상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일본에서 태어난 박점술 씨는 해방된 2년 후 귀국했는데, 바로 그 해 함께 생활했던 이가 유기[놋그릇]를 팔려고 성주군 수륜면 친가를 방문했다. 이 유기상(鍮器商)의 중매로 혼인이 성사되어 18세에 고령 안와리로 들어왔다. 와서 보니 당시 시댁에서는 시어른과 시숙, 남편 등이 10여 명의 유기공을 지휘하여 직접 그릇을 만들고 동시에 유기점을 직영하면서 상인들에게도 납품도 하고 있었다.
플라스틱 제품이 쏟아져 나오면서 시댁의 유기점은 문을 닫았다. 박점술 씨의 남편은 결혼 직후부터 15년간 군인으로 생활했다. 제대 후에는 트럭 행상으로 잠깐 동안 현대판 보부상도 했으며, 군인 경력을 바탕으로 지역 예비군 중대장도 7년간이나 맡았다. 그러는 사이 박점술 씨도 집에 국수 빼는 기계를 들여 놓고 국수도 빼면서 농사도 짓고, 삯바느질과 연탄 배달 등을 하며 4남매를 키웠다.
[보부상 조직의 반수가 된 남편]
남편인 고 곽차효 씨가 고령 보부상 문화 전승에 심혈을 기울인 것은, 60세부터 9년 동안 보부상 조직의 우두머리 격인 접장(接長)과 반수(班首)를 두루 맡아 오면서부터라고 한다. 곽차효 씨는 지휘봉인 물금장(勿禁杖)과 「반수선생안(班首先生案)」, 공문(公文) 등 남겨진 보부상 유품 17점의 내용과 문화적 가치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문화재청과 관계 기관에 제출하여 1992년 마침내 국가 지정 문화재[중요민속자료 제30호]로 지정받았다. 박점술 씨는 “남편이 뛸 듯이 기뻐했어요.”라면서 당시를 회상했다.
2005년 고령군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해 온 보부상인들의 유업을 기리고, 지역 상인의 삶과 문화를 한자리에 모아 역사적 현장으로 기능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고령읍[현 대가야읍] 고아리에 상무사기념관이 건립되었는데, 박점술 씨는 그 또한 남편 곽차효 씨가 살아생전 많은 공을 쏟았던 것이 밑바탕이 되었다고 회상했다. 2010년 현재 상무사기념관에는 100여 점에 달하는 보부상 관련 유물과 자료들이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다.
[고령상무사 ‘별님’으로, 노인복지대학 학장으로 고령 사랑 정신을 실천하다]
박점술 씨는 남편의 뜻을 이어 받아 상무사기념관이 건립된 후 제사 봉행과 유물 전시, 지신밟기, 보부상 가장 행렬 재현 등에 적잖은 힘을 보태 왔다. 대구 서문시장에서 천을 구입해서 ‘고령상무사’를 상징하는 깃발 복제품과 전시 물품인 보부상 도포자락도 손수 제작했다. 이 과정에서 고유(告由)를 하지 않아 남편이 꿈에 나타나자, 여러 사람과 의논해서 사후 고유제까지 지냈다. 이런 노력을 인정받아 지금은 보부상 조직인 고령상무사의 ‘별님’으로 보부상 문화 전승에 애쓰고 있다.
박점술 씨는 2005년부터 연조리에 있는 고령노인회 부설 노인복지대학 학장을 맡고 있다.
노인대학에서는 여성 노인 회원 101명을 대상으로 건강 상식과 성인 자녀-노인 상호 작용 방법, 마음 다스리기 등을 위주로 고령 사랑 정신을 가르친다. 그녀는 특히 고령 사랑 정신이 커 학장으로서의 대외적 활동 과정에서 자신을 소개할 때 반드시 “대가야 도읍지 고령에서 왔습니다.”라고 말하는데, 노인들에게도 항시 이를 당부한단다. “지금의 노인보다는 예비 노인 세대인 가정주부부터 교육을 시켜야 한다.”는 노인대학장으로서 주장이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42년째 국수를 빼고, 유기는 가보로]
박점술 씨의 집에는 42년 된 국수 빼는 기계가 아직까지 돌아가고 있다. 찬장 속에는 과거 안와리 공장에서 시어른과 남편이 만들었던 손때 묻은 유기 몇 점이 가보로 보관되어 있다. 옥상 장독대에는 시어른이 “쌀이나 씻나락[종자]을 채워라.” 하면서 다섯 며느리에게 한 개씩 건네주었던 독도 있다. 이들 물건들에는 삶의 애환과 가족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대가야박물관 측의 기증 요청에 대해 “이것들은 내 목숨과 같은 것”이라고 응답했다는 그녀의 말에 수긍이 가고도 남는다.
박점술 씨는 남편이 국가 유공자라서 고령군국가유공자유족회 회장으로도 활동 중이다. 요양원에 있는 무연고 노인들을 위문하러 바삐 나서며 환히 웃는 그녀의 모습이 유달리 커 보인다.
[정보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