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9A0101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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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경상북도 고령군 고령읍 연조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정동락 |
[산과 내가 어우러진 아름다운 고을, 고령]
대구 방면에서 국도 26호선을 타고 고령터널을 지나면 눈앞으로 대가야읍 전체의 모습이 마치 한 폭의 수채화처럼 펼쳐진다.
대가야읍은 뒤로는 낙타의 등처럼 봉긋봉긋 솟아난 지산동 고분군이 위치한 주산과 앞으로는 회천이 흘러내리는 아담한 도시다. 지금은 곳곳에 아파트가 들어서 있지만, 아직까지 농촌 풍경을 어렴풋이 간직하고 있어 옛 정취가 물씬 풍기는 곳이다.
‘고령’이란 이름은 ‘산이 높고[高] 물이 신령스러운[靈]’ 고장이라는 뜻으로 부른 것이다. 또 고령을 고양(高陽) 혹은 영천(靈川)으로 부르기도 했는데, ‘고양’은 높은 산을, ‘영천’은 신령스러운 내를 의미한다. 여기서 산은 가야산과 그 지맥을 이은 주산을, 내는 낙동강 혹은 그 지류인 회천이다.
조선 전기의 시인 금유(琴柔)는 고령의 지세를 읊으며 “양수요남 군봉공북(兩水繞南 群峯拱北)”, 즉 “두 물줄기가 남쪽을 두르고 여러 산봉우리가 북쪽을 둘러싸고 있다.”고 했다. 또한 신색(申穡)은 “산세는 천 겹으로 빼어나고, 시냇물은 한 줄기로 길다.”고 했다. 산과 내로 이루어진 풍수지리적 환경을 잘 설명하고 있는 말이다. 이처럼 고령은 옛 사람들도 산과 내가 어우러진 풍경을 시를 지어 읊을 만큼 아름다웠던 고을이었다.
대가야읍은 서쪽과 남쪽으로는 백두대간의 지맥인 가야산과 미숭산(美崇山)을 이은 주산이, 그 맞은편으로는 망산(望山)이 감싸고 있다.
또 북쪽과 동쪽으로는 대가천과 안림천이 합해져 회천이 되고, 회천은 다시 낙동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자연 지리적 환경을 갖추고 있다. 그런데 옛 지도에는 미숭산에서 대가야읍의 진산인 주산으로 뻗어 내린 산맥을 유난히 강조하고, 또 주산이 읍내를 감싸 안듯 둘러싼 모습을 잘 표현하고 있다.
특히, 미숭산-주산-연조리의 고령향교로 이어지는 용맥(龍脈)이 선명하고 강하게 표현되고 있다. 이로 보아 옛 사람들도 연조리 일대를 고령 최고의 명당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고령의 풍수 비보 숲 ‘적림(赤林)’]
고령 지역의 옛 지도를 보면, 고을의 북쪽과 동쪽에서 감싸고 있는 내곡천(內谷川) 변에 마치 미인의 눈썹처럼 ‘적림(赤林)’이라는 숲을 표현해 두고 있다. 대가야읍은 지형학적으로 대가천의 공격 사면에 해당하는 곳이다. 따라서 이곳에 마을이 형성되기 위해서는 대가천의 유로(流路)가 대가야읍 쪽으로 범람하지 못하게 하는 조치가 필요했다. 이에 따라 대가천의 범람을 방지하고, 대가야읍 주변에 더 넓은 평야를 확보하기 위해 조성한 인공 숲이 ‘적림’이었다. 아쉽게도 현재는 대가야읍내의 변천으로 적림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없지만, 읍지와 옛 지도를 통해 그 모습을 추측해 볼 수는 있다.
적림은 향림(香林)과 대응되는 숲으로 가천의 동쪽에 위치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문헌 기록을 통해 적림은 최소한 14세기나 15세기경, 즉 여말선초에는 수목이 식재되어 큰 숲을 이루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지도(輿地圖)』와 『지승(地乘)』 등에 수록된 「고령현지도」에 ‘적림’이 잘 표현되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조선 후기인 19세기 전반기까지는 숲이 유지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옛 지도에 표현된 적림은 미숭산에서 발원하여 대가야읍의 신리, 저전리, 중화리를 거쳐 쾌빈리, 헌문리, 고아리에 이르는 내곡천 변에 조성되어 있었다. 그 형태는 마치 반달 모양과 같으며, 고령읍 시가지의 북쪽과 동쪽 부분 전체를 감싸고 있다. 숲의 시작 지점은 현재의 우륵기념탑 부근이며, 끝나는 지점은 고아리의 치사리 앞들까지 이른다. 이는 현재 고령 시가지 외곽으로 개설된 도시순환도로의 구간과 대략 일치한다.
옛 지도에 나타난 숲의 길이는 대략 500~600m 정도이고, 폭은 20~40m 정도로 추정된다. 또 수종은 적림이라는 명칭을 ‘붉은 숲’으로 해석할 수 있다면 적송(赤松)[소나무]이 주종을 이루었을 가능성이 높다. 한 마디로 적림은 풍수 비보((裨補)[도와서 모자라는 것을 채움]의 역할을 위해 조성된 것으로, 읍치(邑治) 지역을 수재(水災)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조성된 인공 조림 숲이었다.
대가야읍은 백두대간의 지맥인 가야산-미숭산-주산으로 이어지는 지맥이 고을 서쪽과 남쪽을 감싸고, 대가천과 회천이 동쪽과 남쪽을 에워싸듯 흐른다.
특히, 대가천의 범람으로 야기되는 수재로부터 고을을 보호하기 위해 내곡천 변에 인공으로 조성한 숲이 적림인 것이다. 자연적인 풍수적 조건에 인공을 가미하여 고을을 가꾸었던 조상들의 지혜가 적림에서도 잘 드러난다.
[고령의 명당(明堂) 연조리]
연조리는 대가야읍의 진산인 주산(主山)을 등지고, 앞으로는 대가야읍내와 대가천·회천이 펼쳐져 있다.
특히, 마을 뒤로 주산의 지맥이 다섯 갈래로 뻗어 내려 마치 ‘물(勿)’ 자 모양을 이룬다. 이들 지맥 사이에는 골짜기가 형성되어 있는데, 이 골짜기 사이에 작은 개울이 흘러내리면서 마을 사람들에게 식수를 제공해 준다. 이처럼 뒤에는 주산이 있어 쉽게 땔감을 구할 수 있고, 골골이 개울이 흘러 내려 식수를 제공해 주기에 사람들은 이 개울 옆에 작은 텃밭을 가꾸어 농사를 지었다. 대가야읍 앞으로 흐르는 회천은 큰 홍수가 나 주변에 피해를 주었지만 연조리 일대는 지대가 높아서 피해를 입지 않았다. 이처럼 연조리는 대가야읍내에서 사람들이 살기에 가장 적합한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연조리를 중심으로 한 고령 지역은 예부터 사람이 살기 좋은 지역으로 손꼽혔다. 그 때문에 조선시대 지리학자 이중환(李重煥)은 『택리지(擇里志)』에서 고령에 대해 “골 바깥 가야천 주변은 논이 아주 기름져서 종자 한 말을 뿌리면 소출이 120~130말이나 되며, 적더라도 80말이 넘는다. 물이 넉넉하여 가뭄을 모르고 또 밭에는 목화가 잘 되어서 이곳을 의식(衣食)의 고장이라 일컫는다.”고 하였다. 이중환은 고령을 ‘의식의 고장’이라 할 만큼 농업 생산에 유리한 조건을 갖추었다고 평가하였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연조리가 있었다. 고령의 최고 명당이 바로 연조리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