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90149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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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畓谷里造成-關聯-傳說 |
영어의미역 | Legend of Making Dapgok-ri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작품/설화 |
지역 | 경상북도 고령군 우곡면 답곡리 |
집필자 | 남경란 |
성격 | 설화|전설|지명유래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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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등장인물 | 성씨 가문 |
관련지명 | 답곡리|논실 |
모티프 유형 | 사람이 살지 않던 골짜기|논이 많은 마을로 조성한 사연 |
[정의]
경상북도 고령군 우곡면 답곡리의 마을 조성과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개설]
「답곡리 조성과 관련된 전설」은 우곡면 답곡리 마을을 개척할 때 주위에 논이 많았기 때문에 답곡이라고 붙여졌다는 지명유래담이다. 우곡면 답곡리는 본래 현풍군 지역으로 논이 많아 답곡 또는 논실이라 하여 답곡방이 되어 희정, 아곡, 척사, 봉산 등의 4개 동을 관할했다. 1906년 고령군에 편입되었으며,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희정동을 병합하여 우곡면에 편입되었다.
[내용]
고령군 우곡면 답곡리는 원래 한자 ‘답곡(畓谷)’의 순우리말인 ‘논실’이라 불렸다. 논실이라는 지명은 500여 년 전에 창녕 사람인 성원(成元)이란 선비가 이 마을을 개척할 때 주위에 논이 많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마을에 전해지고 있는 이야기로는 옛날 고령군 우곡면 답곡리에는 사람이 살지 않았는데 성씨 성을 가진 한 사람이 이곳에 오게 되었다. 성씨가 조그만 산을 바라보니 나무라곤 하나도 보이지 않자 ‘내가 저 산에 나무를 심어 가꾸어 보리라’ 이렇게 마음먹고 나무를 심고 가꾸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나무를 심고 가꾸어도 나무는 죽어 버리고 풀 한 포기 자라지 않았다.
그래도 낙심하지 않고 계속 나무를 심었지만 자꾸만 죽어갔다. 가족들은 나무 심는 것을 만류하였으나 성씨는 나이가 들어도 심고 또 심었다. 그러다가 성씨는 병이 들어 죽음을 맞이하였다. 임종 직전 아들들을 불러 놓고 “내가 일생을 저 산 가꾸기에 정열을 쏟았지만 내 성의가 부족하여 나무가 자라지 않으니 내가 죽거든 산봉우리에 묻되 봉우리는 만들지 말고 비석도 세우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자식들은 유언대로 시신을 묻어주고 비석을 세우지 않았다.
이듬해 봄이 되자 조그마한 샘 줄기가 생기더니 맑은 샘물이 흐르기 시작하였다. 그 뒤부터 풀도 자라고 나무도 자라기 시작하였다. 성씨의 후손들도 번창하고 살기 좋은 마을로 변하자 마을이 번성하여 오늘의 답곡리가 되었다고 한다. 6·25전쟁 때 폭격으로 인하여 산봉우리의 묘소는 물론 샘도 없어졌다. 그러자 이 산에 있던 나무들이 죽고 지금은 느티나무 한 그루만 서 있다. 그래도 성씨의 후손들은 답곡리를 떠나지 않고 오늘날까지 마을을 지키고 있다.
[모티프 분석]
「답곡리 조성과 관련된 전설」의 주요 모티프는 ‘사람이 살지 않던 골짜기’, ‘논이 많은 마을로 조성한 사연’ 등이다. 옛날 아무도 살지 않았던 우곡면 답곡리를 성씨 가문에서 조성할 때, 주위에 ‘논이 많은 골짜기’라는 뜻의 답곡(畓谷), 순우리말 ‘논실’이라고도 불렀다는 지명유래담이다. 이때 ‘실’은 우리말 ‘골짜기’, 혹은 ‘마을’이라는 뜻을 가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