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90098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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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順天 |
영어음역 | Park Suncheon |
이칭/별칭 | 박명련(朴命連)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경상북도 고령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일수 |
[정의]
경상북도 고령군 지역에서 활동한 정치인.
[개설]
박순천(朴順天)[1898~1983]은 지금의 부산광역시 기장군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밀양(密陽)이며, 본명은 박명련(朴命連)이다. 한학자인 박재형의 무남독녀로, 일찍부터 기독교에 입교하였다. 1917년 동래의 일신여학교를 졸업한 뒤 마산의 의신여학교 교사로 재직하였다.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교육 활동과 정치 활동을 하였다. 일제강점기 활동에 대해서는 친일 반민족 행위를 둘러싼 찬반양론이 제기되고 있다.
[활동사항]
박순천은 마산 의신여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3·1운동에 참가하였다가 체포되었다. 체포 일주일 만에 보석으로 풀려난 뒤 도피 생활을 시작하여 일본으로 피신하였다. 일본의 요시오카여자의학전문에 편입하였으나, 1년 후 수배 인물임이 탄로났다. 체포된 뒤 마산으로 압송되어 1년간 복역하고 1921년 8월 출감하였다. 이 무렵 남편 변희용(卞熙鎔)을 알게 되었다. 출감 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1926년 니혼여대[日本女大] 사회학부를 졸업한 후 28세에 결혼하였다. 고령의 시댁에서 야학 운동을 벌이면서 농사를 돕다가 1936년 무렵 상경하였다.
서울에 올라온 뒤 당시 박정근이 경영하던 금강견구 공장의 여공감으로 취직하여 1년 동안 여성 노동 현장에 있었다. 그 뒤 이우(李禑)의 소유인 벽돌집을 매수하여 경성가정여숙(京城家政女塾)을 설립하고 교육 사업을 벌였다. 1940년 12월 15일 서울 부민관에서 황도 사상의 실천 보급을 목적으로 결성된 황도학회의 발기인으로 참가하였다. 황도학회는 첫째 황도 사상의 학습, 둘째 황도 정신의 보급, 셋째 신사 참배의 실천과 장려 등을 실천 방책으로 한 친일 단체이다.
1941년 12월 서울 부민관에서 열린 조선임전보국단 주최 결전 부인 대회에 연사로 출강하였다. 부인 대회는 군수 자재의 헌납 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또한 조선임전보국단의 군수 헌납, 군복 수립 작업, 전황 뉴스 방송 강연을 벌이다가 1942년 1월 무렵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의 지도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41년 일제가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킨 후 「여성정신근로령」이 공포되었고, 이에 여성들을 근로정신대 및 종군위안부로 동원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때 학교의 부교장으로 재직하면서 교장 황신덕과 함께 학생들을 대상으로 근로정신대에 출정을 종용하는 연설을 행한 것으로 알져지고 있다.
해방 후에는 교육 활동과 우익의 위치에서 정치 활동을 하였다. 1945년 중앙여자중학교 부교장이 되었다. 1945년 8월 16일 좌우익의 여성 활동가들이 모여 결성된 건국부녀동맹 결성준비위원회의 부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건국부녀동맹이 좌우익으로 나뉘면서 우익계 여성 활동에 전념하였고, 1947년부터 독립촉성애국부인회 회장을 겸하다가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감찰 위원에 임명되었다.
1950년까지 『부인신문』 사장, 대한부인회 회장, 대한여자청년단 단장 등을 역임하였고 1950년부터 제2·4·5·6·7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한국 여성 정치인의 제1인자가 되었다. 20년 가까운 정치인 생활에서 민주당 총재, 민중당 최고위원, 신민당 고문 등 시종 야당 지도자로서 일관하였다. 1969년 통일원 고문, 1972년 근명학원(槿明學園) 이사장, 중앙여자고등학교 이사 등에 취임하였고, 1976년에는 육영수여사추모사업회 이사장이 되었으며 1980년 국정자문위원에 임명되었다.
[저술 및 작품]
저술로 1941년 『춘추』 7월호에 발표한 「조선의 남편과 아버지에게」와 1971년 『다리』에 실린 「내가 걸어온 야당 사반세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