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90098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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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斗勳 |
영어음역 | Yi Duhun |
이칭/별칭 | 중훈(中勳),대형(大衡),홍와(弘窩)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경상북도 고령군 고령읍 본관리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윤정원 |
성격 | 유학자|계몽운동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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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경상북도 고령군 고령읍 본관리 |
성별 | 남 |
생년 | 1856년 |
몰년 | 1918년 |
본관 | 성산 |
[정의]
개항기 고령 출신의 계몽운동가.
[개설]
이두훈(李斗勳)[1856~1918]은 고려 왕조 이후 고령에서 세거한 성산이씨(星山李氏) 문중의 후예로, 초명은 중훈(中勳)이고 자는 대형(大衡)이며 호는 홍와(弘窩)이다. 한평생 학문과 예법을 숭상하며 제자 양성에 힘썼다.
이두훈의 집안은 세종 대의 이사징을 비롯하여 이동례(李東禮), 이현룡(李見龍), 이문룡 등의 학자를 배출하였다. 특히 9대조인 이문룡은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문인으로 존왕양이론(尊王攘夷論)을 주장하여 민족과 성리학의 정통성을 내세운 인물이다. 이두훈은 이러한 조상의 사상적 배경을 이어받았을 뿐만 아니라, 한주학파 유학자 이진상(李震相)에게서 수학한 한주8현의 한 사람으로 고령 지역의 대표적인 유학자다.
[활동사항]
이두훈은 1896년(고종 33) 곽종석, 윤주하 등과 함께 각국 공사관에 포고문을 발표한 후 귀향하여 내산서당을 세우고 애국지사인 김상덕(金尙德), 이방환, 이기락 등 많은 애국지사를 배출하였다. 1905년(고종 42) 제2차 한일 협약[을사보호조약] 이후 배일 언론 투쟁을 벌였으며, 1907년(순종 1) 고령군 국채보상회에도 참가하였다. 1913년에는 장석영과 함께 만주, 노령 등지의 망명지를 찾아 여행하기도 하였다.
이두훈은 위정척사 사상에 기초한 국권 수호 운동으로서 배일 투쟁을 전개하는 동시에 서양의 학문 체계인 신학문을 인식하고 수용하는 계몽 운동을 전개하였는데, 제자들에게 민족의 독립을 보존하려면 신학문을 배워야 한다고 역설하여 독립지사 수석(瘦石) 남형우(南亨祐)에게 서울의 보성전문학교에 진학하도록 권유하였다.
김상덕이 이두훈의 영향을 받아 일본 유학을 결행하였는데, 김상덕은 그 후 한평생 독립운동가로서 항일 투쟁에 전념하였다. 또한 이두훈의 아들 이흔(李俒)[1887~1948]이 중국 장제스[蔣介石] 정부의 장성으로서 전 생애를 항일 투쟁에 나설 수 있었던 것도 이두훈의 애국적인 인재 양성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한주학파 곽종석은 이두훈의 제문에서 “진실로 그 도를 지킴에 있어 남의 어려움을 배려하고 구해 줌이 군자와 같다”라며 그를 높이 평가하였다.
[저술 및 작품]
『동화세기(東華世紀)』 10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