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9009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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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俒 |
영어음역 | Yi Wan |
이칭/별칭 | 성순(性純),수산(壽山),공명개(孔明凱),이흔(李俒)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고령군 고령읍 내상리 40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윤정원 |
성격 | 독립운동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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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경상북도 고령군 고령읍 내상리 40 |
성별 | 남 |
생년 | 1887년 |
몰년 | 1948년 |
본관 | 성산 |
대표경력 | 장제스 정부 군인 |
[정의]
일제강점기 고령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이흔(李俒)[1887~1948]은 본관이 성산(星山)으로, 자는 성순(性純)이고, 호는 수산(壽山)이다. 중국에서 공명개(孔明凱)라는 이름으로도 활동하였다. 지금의 고령군 대가야읍 내상리에서 대한제국 말 민족 계몽 운동을 펼친 홍와(弘窩) 이두훈(李斗勳)의 아들로 태어났다.
[활동사항]
이완은 어려서부터 행실이 뛰어나게 훌륭하고 단정하여 주위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1910년 일제에 주권이 침탈되자 나라를 위해 큰 뜻을 펼치기 바라는 아버지의 권유로 1931년 중국 상하이[上海]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찾아갔다. 그 후 동양평화단(東洋平和團), 유림단(儒林團)과 관계를 맺고 국권 회복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숨어 투쟁해서 조국의 광복을 성취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 판단하여 중국 황포군관학교에 입학하였다. 졸업 후 장제스[蔣介石] 정부의 군인으로 항일 투쟁에 나서 큰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당시 공명개라는 이름으로 활동하였다. 조국이 광복 된 후 귀국하고자 하였으나 조국이 분단되는 것을 보고 귀국을 포기하였다. 그 후 다시 중국 군계의 중장으로 취임하여 마쭈섬[馬祖島]과 진먼섬[金門島] 전투에 참전하여 중상을 입고 치료 중 향년 7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한편 이완의 활동과 관련하여 다른 이견이 제기되고 있다. 독립운동가 성산 김창숙은 자신의 회상록에서 이문치(李文治)[1858~1932]와 그 사위 이흔(李俒)이 조선의 독립 자금을 착복하고 도피했을 뿐만 아니라 자객을 보내어 생명을 위협했다는 의심을 품고 있다. 이문치는 중국의 항일 민족 운동가로서 경상북도 성주 출신의 한주학파 민족운동가였던 한계(韓溪) 이승희[1847~1916]와의 교류를 통해 한국의 민족 운동가들과 인연을 가졌던 자이다.
곽종석, 김창숙과도 교류를 하였으며, 한국의 항일 운동을 지원하는 활동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창숙의 회고록에 등장하는 이문치의 사위 이완이 고령 출신의 항일 활동가였던 이완과 동일 인물인지는 사료 상 확실하지 않으나, 이문치가 홍콩에서 활동할 당시 이완 또한 홍콩에서 활동을 하였고, 그의 무덤이 현재 홍콩에 있다는 근거로 동일 인물임을 주장하는 의견이 제기되고 있다.
이문치는 중국에서 청렴함으로 이름이 높은 인물이었으며 또한 이후 그의 언행을 보건대 자금을 착복했을 리는 없을 것 같다는 의견 또한 제기되고 있다. 그 후 이 사건이 어떻게 해결되어 의혹이 해소되었는지와 이문치의 사위인 이완이 고령 출신의 항일운동가 이완과 동일 인물인지에 대해 아직까지 정확한 자료가 발견되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