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9009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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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申哲休 |
영어음역 | Sin Cheolhyu |
이칭/별칭 | 해영(海影),우동(愚童)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고령군 대가야읍 연조리 324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윤정원 |
성격 | 독립운동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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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경상북도 고령군 대가야읍 연조리 324 |
성별 | 남 |
생년 | 1898년 |
몰년 | 1980년 |
대표경력 | 신간회 고령지회 지회장 |
[정의]
일제강점기 고령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신철휴(申哲休)[1898~1980]는 지금의 고령군 대가야읍 연조리에서 태어났다. 호는 해영(海影)이며, 우동(愚童)이라는 별명으로도 불렸다. 아버지는 신진구(申鎭求)이다.
[활동사항]
신철휴는 어려서부터 성품이 강직하고 도량이 넓었으며 한학과 글씨에 능하였고, 효도와 애국심이 강하였다. 20세인 1918년 5월, 민족의 비통한 참상을 개탄하여 만주로 건너갔다. 독립운동에 투신하기 위해 1919년 9월 지린성[吉林省] 류허현[柳河縣] 합니하[洽泥河]에서 조선 독립운동의 무관 양성을 목적으로 설립된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를 졸업하였다. 졸업에 앞서 6월경 신흥무관학교 생도인 김원봉(金元鳳), 양건호(梁健浩), 서상락(徐相洛), 김옥(金玉) 등과 함께 조선의 독립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서둘러 비밀 결사를 조직하여 활동에 나서야 한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신철휴·곽재기(郭在驥), 윤소룡(尹小龍)은 김원봉의 권유로, 이낙준(李洛俊)은 곽재기의 설득에 모두 의기투합하였다. 그해 11월 9일 지린성[吉林省] 파호문(巴虎門) 밖의 중국인 번씨(藩氏) 집에서 동지들과 함께 항일 비밀 결사인 의열단(義烈團)을 결성하였다. 단장인 의백(義伯)에 김원봉을 선출하고 무력 투쟁과 직접 행동을 통하여 조국 독립을 쟁취하자는 기본 방침을 수립하는 한편, 무기와 폭탄을 구입하여 국내의 기관 파괴와 교란, 일본인 관료 및 친일 인사 암살 등을 실천하기로 하였다.
의열단을 창단한 이들은 근거지를 베이징[北京]으로 옮기고 베이징과 상하이[上海]에서 활동하고 있는 우국지사를 포섭하여 1925년에는 단원이 70여 명에 이르렀다. 의열단은 조직 당시 각처에서 활동 중인 독립운동 단체가 너무나 미온적인 데 대해 개탄하면서 급진적인 독립운동을 표방하였다. 그리하여 외교 선전이나 만세 시위 같은 평화적인 방법에서 벗어나 조선총독부를 비롯하여 동양척식주식회사, 식산은행, 재판소, 경찰서 또는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사 등 일제의 주요 기관을 폭파하고 관련 인사 등을 암살하는 등 적극적으로 움직여 일제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의열단은 첫 사업으로 밀양경찰서를 폭파하는 계획을 세웠다. 1920년 초 신철휴는 곽재기 등과 만주로부터 폭탄 등 무기를 가지고 입국한 뒤 밀양에서 폭파 거사 활동을 벌이던 중 사전에 일경에게 발각되어 뜻을 이루지 못한 채 1920년 3월 24세 나이로 검거되었다. 1921년 6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7년형을 선고받았으나, 항소하여 1년간 복역하고 출옥하였다.
이후 1927년 폭탄, 권총 등의 무기를 가지고 입국한 의열단원 이종암(李鍾岩)과 비밀리에 수차례 회합을 가지고, 자금 조달을 위하여 경상도 일대를 무대로 모금 활동을 하였다. 그리고 자금이 조달되면 단독으로 일본 궁성을 폭파하겠다는 계획을 세웠지만, 구영필(具寧必)의 밀고로 붙잡히고 말았다. 이후 구영필은 만주 영고탑(寧古塔)에서 항일 독립운동 단체인 신민부(新民府)의 별동대원 황덕환(黃德煥)에게 피살되었다. 이 사건으로 1925년 12월 이종암을 비롯한 10명이 살인미수 등으로 송치되었다. 이때도 신철휴는 모진 고문을 받았으며, 증거 불충분으로 불기소 처분을 받았으나 3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이후 1928년 ‘청주일심단(淸州一心團) 사건’에도 연루되는 등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예비 검속을 받아 많은 고초를 겪었다. 출감한 후 고향인 고령에 머물면서 1928년 10월 신간회 고령지회 지회장으로 활약하였고, 고령청년동맹을 새로 조직하여 민중 계몽과 지도에 주력하였다.
[상훈과 추모]
1977년과 1990년에 각각 건국포장과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고, 1983년에는 고령향교 뒤편 연조공원 어귀에 그의 공적을 기린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