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9009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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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崔永敦 |
영어음역 | Choe Yeongdon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고령군 쌍림면 안림리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윤정원 |
성격 | 독립운동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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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경상북도 고령군 쌍림면 안림리 |
성별 | 남 |
생년 | 1897년 |
몰년 | 1985년 |
본관 | 화순 |
대표경력 | 진명학교 교사 |
[정의]
일제강점기 고령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최영돈(崔永敦)[1897~1985]은 본관이 화순(和順)으로, 1897년 1월 지금의 고령군 쌍림면 안림리에서 태어났다.
[활동사항]
최영돈은 향리에서 수학한 후 대구에 있는 계성학교(啓聖學校)를 졸업하였다. 3·1운동 당시 23세 나이로 경상북도 김천 소재 진명학교 교사로 근무하고 있을 때 전국적으로 독립 만세 운동이 전개되고 있는데도 자신의 지방에만 만세 운동이 일어나지 않음을 부끄럽게 여기고, 1919년 3월 24일 김태연(金泰淵)·허철(許喆)·김종수(金琮洙) 등과 김천군 개령면 동부리의 은창서(殷昌瑞)의 집에서 만나 독립 만세 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리하여 이날 오후 4시 기독교인들과 함께 마을 근처의 산에 올라가 독립 만세를 부르며 지역의 독립운동을 이끌었다.
이 시위가 도화선이 되어 4월 3일과 4월 4일에 마을 사람들이 연이어 만세 운동을 벌였다. 4월 6일에는 머슴 김임천(金任天) 등을 비롯한 마을 사람들 역시 뒷산에 올라가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그 후 최영돈을 비롯한 시위 가담자가 모두 일제에 체포되었으며, 최영돈은 4월 15일 대구지방법원 김천지청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태형 90대를 선고받고 혹독한 고문과 악형을 당하였다. 이때 받은 고문으로 일생을 고통 속에 살았다.
1921년 2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 공채 모집 운동에 적극 가담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활동을 널리 알렸다. 또한 송명옥(宋明玉), 장이석(張利錫), 김종수 등의 애국 청년들을 만주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에 입교하도록 주선하였다. 그 무렵 미국의 의원단 일행이 한국의 실정을 파악하기 위하여 온다는 것과 워싱턴에서 국제회의가 개최된다는 소식을 듣고 이현수(李賢壽), 김태연, 이학로(李學魯) 등과 더불어 독립을 요구하는 청원서를 작성하여 부쳤다.
이들은 독립 청원 취지서를 『자유』에 싣고, 그것을 『동아일보』·『조선일보』와 각 국내 신문사에 배포하였다. 나아가 독립 청원 취지서를 영문으로 인쇄하여 대구, 평양, 전주의 외국인 선교사에게도 보냈다. 1923년 1월 9일 도피 생활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한 이현수가 자수하여, 1월 24일 김태연과 함께 제령 제7호[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위반 혐의로 다시 체포되었으나 대구지방검찰청에서 증거 불충분으로 공소가 유예되었다. 그 후에도 일제의 감시와 압제에도 굴하지 않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신흥무관학교에 군자금을 보내는 등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상훈과 추모]
1983년과 1990년에 각각 대통령 표창과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고, 1993년 고령군 대가야읍 연조리 가야공원에 추모비가 건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