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9009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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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南亨祐 |
영어음역 | Nam Hyeongwoo |
이칭/별칭 | 유석(瘐石)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고령군 대가야읍 내상리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권대웅 |
성격 | 독립운동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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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경상북도 고령군 대가야읍 내상리 |
성별 | 남 |
생년 | 1875년 |
몰년 | 1943년 |
본관 | 의령 |
대표경력 | 대한민국임시정부 교통총장 |
[정의]
일제강점기 고령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남형우(南亨祐)[1875~1943]는 본관이 의령(宜寧)으로, 호는 유석(瘐石)이다. 지금의 고령군 대가야읍 내상리에서 태어났다.
[활동사항]
남형우는 1908년 문인인 홍와(弘窩) 이두훈(李斗勳)의 권유로 보성전문학교 법과에 입학한 뒤 교남교육회(嶠南敎育會) 평의원과 1909년 대동청년단(大東靑年團) 단원으로 활동하였다. 1911년부터 1917년까지 보성전문학교 법률학 교수로 학감·교감·교장을 역임하였고, 1915년 1월 15일 대구에서 조직된 비밀결사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 중앙총부에 가입하였으며, 1915년 3월 조선산직장려계(朝鮮産織獎勵契) 조직 등을 통해 국권 회복 운동에 참여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전개되자 경상남도 창원 등지에서 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다.
1919년 3월 17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新韓村)에서 한족회(韓族會)가 설립한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의 산업총장(産業總長)에 선임되었으며, 같은 해 4월 유림단(儒林團)의 독립청원운동(獨立請願運動)의 전개 과정에서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할 청원서와 군자금 5,000원을 지참하고 조선국권회복단 중앙총부를 대표하여 중국 상하이[上海]로 건너갔다. 1919년 4월 13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법부차장, 4월 25일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 겸 의원자격심사위원, 5월 10일 법무총장, 1920년 11월 교통총장으로 교통국 운영 등을 거쳐 1921년 4월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하였다.
1921년 6월 국민대표회의 준비위원회 위원장에 선임되어 독립운동 단체의 통합에 전력하였고, 1922년 4월 친일분자 및 밀정 총살과 군자금 모집을 목적으로 한 다물단(多勿團)을 조직하였다. 1923년 1월 다물단원 서동일(徐東日)을 국내에 잠입시켜 경상북도 청도·경산 등지에서 군자금 1,400여 원을 모집하여 송금하게 하였으며, 1924년 5월 30일 재입국한 서동일과 배천택(裵天澤) 등이 군자금을 모집하던 중 체포되면서 활동이 중단되었다.
1928년 남형우는 만주 하얼빈으로 가족과 함께 이주하여 사설 학원을 경영하였다. 1930년 밀고로 공산주의자의 혐의를 받고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가 석방되었으며, 1931년 불복수토병(不伏水土病)으로 귀국하여 고향에서 요양하였다. 1943년 3월 13일 일제의 감시와 위협, 일본식 성명 강요[創氏改名] 및 신사 참배 강요 등을 참을 수 없어 음독 자결하였다고 한다.
[상훈과 추모]
1983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고, 1984년 고령군 대가야읍의 가야공원(伽倻公園)에 순국 기념비가 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