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9009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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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利貞-理貞 |
영어음역 | Yi Jeong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종교인 |
지역 | 경상북도 고령군 |
시대 | 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 |
집필자 | 이형기 |
[정의]
통일신라의 승려.
[가계]
이정(利貞)은 신라 왕실의 후원을 받아 순응(順應)이 시작한 해인사 창건 불사를 완성한 인물이다. 왕실에서 추진한 불사에 참여한 것으로 보아 신분은 그리 낮은 편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해인사가 창건된 100여 년 후인 900년 즈음에 해인사에 머물던 최치원(崔致遠)은 순응 및 이정과 관련된 자료를 찬술하였다. 그중에는 『석이정전(釋利貞傳)』도 있었으나 현재는 전하고 않으며, 단편적인 자료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수록되어 전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고령군 건치연혁조에 실린 내용을 보면, “가야산 신 정견모주가 천신(天神) 이비가(夷毗訶)와 감응하여 대가야 왕 뇌질주일(惱窒朱日)과 금관국 왕 뇌질청예(惱窒淸裔) 두 사람을 낳았다. 뇌질주일은 이진아시왕(伊珍阿豉王)의 다른 이름이고 청예는 수로왕(首露王)의 다른 이름이다”라고 한다. 즉, 『석이정전』에는 김해의 금관가야와 구별되는 고령의 대가야 중심 건국 신화의 내용이 실려 있는 것이다.
이처럼 이정의 전기 속에 대가야의 건국 신화가 수록된 이유는 이정이 대가야 왕족의 후예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최치원이 찬한 『석순응전(釋順應傳)』에도 대가야의 왕계가 표현되어 있는데, 순응은 월광태자(月光太子)의 후예로 보인다. 이를 통해 이정은 순응과 마찬가지로 대가야 왕족의 후예, 특히 월광태자와 가계가 연결되는 것으로 생각된다.
합천 해인사 내에는 대가야 건국 신화와 관련된 정견모주를 모시는 사당인 정견천왕사(正見天王祠)가 있었다고 한다. 이를 통해 해인사가 창건되기 전에는 정견모주를 제사 지내는 사당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정이 순응의 뒤를 이어 해인사를 창건하게 된 까닭은 자신의 선조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활동사항]
이정은 대가야 왕족의 후손으로, 9세기 초인 802년 신라 왕실의 후원을 받아 해인사를 창건하는 불사를 순응의 뒤를 이어 완성하였고 전한다. 현재 이정과 관련된 자료를 보면 다음과 같다.
(1) 『석순응전』-최치원이 찬하였으며 현전하지 않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대가야의 건국 신화와 관련하여 일부 전한다. 901~904년 사이에 찬술되었다.
(2) 『고운집』-최치원의 문집으로, 「신라가야산해인사선안주원벽기(新羅伽倻山海印寺善安住院璧記)」·「이정화상찬(利貞和尙贊)」에 순응·이정의 행적과 해인사 창건 과정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900~904년 사이에 찬술되었다.
(3) 「가야산해인사고적(伽倻山海印寺古籍)」-찬자는 미상이며, 943년 이후 찬술되었다. 순응과 이정의 행적 및 해인사 창건 과정 기술하고 있으며 설화적 성격이 강하다.
(4) 『삼국사기(三國史記)』 권10 애장왕 3년 8월조-해인사의 창건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5) 「거제현우두산현암선사중수기(巨濟縣牛頭山見庵禪寺重修記)」-이색이 찬하였으며, 순응과 이정이 중국 보지(寶志)의 법을 이어 우두산의 현암선사(見庵禪寺)를 창건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가야산해인사고적」을 참조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정과 관련된 자료는 해인사가 창건된 지 100여 년이 지난 900년을 전후한 시기에 최치원에 의해 정리되었다. 이정의 활동에 대해서는 그의 전기인 『석이정전』이 가장 자세하겠지만, 현전하지 않는다. 다만 「신라가야산해인사선안주원벽기」, 「가야산해인사고적」 등을 통해 약간이나마 정리할 수 있다.
우선, 「신라가야산해인사선안주원벽기」에 802년 해인사의 창건은 신라 왕실의 후원, 특히 애장왕의 조모인 성목태후(聖穆太后)의 지원이 있었던 것으로 전한다. 하지만 성목태후는 799년 이전 세상을 떠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애장왕과 당시 섭정하고 있던 김언승(金彦昇)[훗날 헌덕왕]이 자신들의 조모이자 모친인 성목태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해인사 창건을 후원하였던 것으로 정리된다. 특히, 이정은 순응이 해인사 창건 불사 도중에 입적하자 그 뒤를 이어 공사를 진행하여 완성하였던 것으로 전한다. 즉, 이정은 해인사의 창건 불사를 끝맺음한 승려였던 것이다.
이외에 이정의 행적에 대해서는 잘 알 수 없다. 다만, 그와 함께 해인사 창건을 주도한 순응을 통해 몇 가지 사실을 추측해 볼 수 있다. 순응은 의상의 손제자인 신림(神琳)의 제자로 부석사(浮石寺) 계의 화엄종 승려였다. 따라서 이정도 순응과 마찬가지로 의상계 화엄종 승려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신라가야산해인사선안주원벽기」에는 이정을 선백(禪伯)이라고 하여 언뜻 보면 선종 승려로 보이기도 한다. 「가야산해인사고적」에는 이정이 순응과 함께 당에 유학하였던 것으로 전한다. 순응은 766년(혜공왕 2)에 입당하여 우두선(牛頭禪)을 익혀 교선일치의 사상 경향을 지닌 것으로 파악되며, 790년대 중반 즈음에 귀국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정도 순응과 함께 입당 귀국하였고, 비슷한 사상 경향을 지녔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 때문에 최치원이 이정을 선백으로 표현한 것이 아닌가 한다. 다만, 「신라가야산해인사선안주원벽기」에는 이정은 순응이 입적한 뒤에 해인사를 완공하였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순응이 강원도 양양군 서면의 선림원(禪林院)으로 옮기자 그 뒤를 이어 해인사의 창건을 완료하였다. 이로 보아 순응의 동문 후배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상을 요약해 보면, 이정은 의상계 화엄종 승려로 입당하여 우두선을 익혀 교선일치 사상 경향을 지녔던 것으로 정리된다. 순응이 입적한 이후에도 한동안 활동하였던 것으로 보이나, 정확한 입적 연도는 알 수 없다.
[학문과 사상]
이정은 대가야 왕족의 후예로 고령·합천 출신이며, 순응과 비슷한 5두품에 준하는 신분의 지방 출신이었다. 멸망한 대가야 왕족의 후예가 겪는 신분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출가하여 의상계 화엄종 승려가 되었다. 아마도 동일한 신분적 배경을 지닌 순응의 영향이 작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766년경 순응과 함께 당에 가서 우두선을 익히는 등 교선일치적 사상 경향을 지녔다. 802년 순응과 함께 해인사 창건을 주도하였으며, 순응이 선림원으로 떠나자 해인사 창건을 마무리하였다.
이정과 관련된 자료가 부족하여 그의 저술이나 작품, 묘소 등은 알 수 없다. 다만, 900년경에 해인사에 머물던 최치원은 이정의 전기를 찬술하였다. 이때 해인사를 창건한 그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고 그를 추모하는 사업이 진행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최치원의 『석이정전』과 「이정화상찬」은 그에 대한 재평가와 추모의 결과로 찬술된 것으로 여겨진다. 특히, 「이정화상찬」에서 최치원은 그가 해인사를 창건한 사실을 높게 평가하였다. 전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한 조각 구름과 한 마리의 학처럼/ 암학에서 홀로 그림자와 짝하는 도다./ 연화장세계의 사원[해인사]을 처음 세워/ 혼돈에 구멍이 뚫리게 하였나니./ 서원이 막힘없이 시원하게 통해/ 인간과 천상이 모두 의지하는 도다.[片雲獨鶴 儷影嚴壑 草創蓮刹 混沌逢鑿 願霈無礙 人天有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