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9009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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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順應 |
영어음역 | Sun Eung |
분야 | 종교/불교,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종교인 |
지역 | 경상북도 고령군 |
시대 | 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 |
집필자 | 이형기 |
[정의]
통일신라의 승려.
[가계]
순응(順應)은 766년 당에 들어가 선을 익히고 귀국한 뒤 성목태후를 비롯한 신라 왕실의 후원을 받아 해인사 창건 불사를 시작하였다. 이로 보아 신분은 그리 낮은 편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최치원(崔致遠)은 말년을 해인사에 머물면서 순응과 관련한 자료를 남겼다. 특히, 최치원이 찬한 『석순응전(釋順應傳)』은 현전하지 않지만, 내용의 일부가 1530년(중종 25) 완성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고령군과 합천군 조에 실려 있다. 고령군조에 실린 『석순응전』의 내용은 “대가야국 월광태자(月光太子)는 정견모주(正見母主)의 10세손이다. 아버지는 이뇌왕(異腦王)인데 신라에 구혼하여 이찬 비지배(比枝輩)의 딸을 맞아 태자를 낳았으니, 이뇌왕은 뇌질주일(惱窒朱日)의 8세손이다”라고 전한다. 또한 합천군의 거덕사(擧德寺)는 “옛 대가야국 태자인 월광이 결연한 곳이다”라고 한다.
정견모주는 대가야 건국 신화에서 시조인 뇌질주일을 낳은 가야산 신이며, 월광태자는 대가야의 마지막 태자였다. 이처럼 순응의 전기에 이뇌왕, 월광태자, 정견모주 등 대가야의 왕계가 소개되어 있는 이유는 단순히 대가야의 건국 신화나 가야산과 관련된 내력을 전하기 위한 것이 아닌 듯하다. 아마도 순응은 정견모주-뇌질주일 …… 이뇌왕-월광태자로 이어지는 대가야 왕족의 후예였기 때문인 듯싶다.
대가야는 562년 신라에 끝까지 항거하다가 병합된 국가다. 이 때문에 대가야의 왕족과 귀족 상당수는 충주나 여타 지역에 사민이 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대가야 왕족 일부는 그대로 고령과 합천 등지에 남아 신라의 지방 통치의 일선에서 촌주(村主) 등 유력한 세력으로 온존하였다.
8세기 중엽부터 9세기 초에 활동한 순응이나 이정(利貞)의 존재는 이러한 사실을 알려주는 자료인 셈이다. 월광태자와 관련된 것으로 전하는 합천의 월광사(月光寺)나 거덕사는 대가야 왕족의 후예들이 선조를 기리기 위해 창건한 사원으로 생각할 수 있다. 특히, 해인사 안에는 대가야의 시조인 뇌질주일을 낳은 정견모주를 모시는 사당인 정견천왕사(正見天王祠)가 있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대가야 왕족의 후손인 순응과 이정이 가야산신 정견모주의 사당 터에 해인사를 창건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상에서처럼 순응의 가계는 정견모주에서 이어진 대가야의 마지막 태자인 월광태자의 후손이었다. 순응이 해인사를 창건한 이유도 이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순응이 신라 왕실의 후원으로 해인사를 창건할 수 있었던 까닭은 선조인 월광태자가 대가야와 신라의 결혼 동맹으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즉, 월광태자는 법흥왕 때 대가야의 이뇌왕과 신라의 이찬 비조부(比助夫)의 딸 사이에서 출생하였기 때문에, 그의 후손인 순응은 신라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고 하겠다.
[활동사항]
순응은 대가야 왕족인 월광태자의 후손으로, 9세기 초인 802년 신라 왕실의 후원을 받아 해인사를 창건하였고 전한다. 현재 순응과 관련된 자료를 보면 다음과 같다.
(1) 『석순응전』-최치원이 찬하였으나 현전하지 않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대가야의 왕계와 관련하여 일부가 전한다. 901~904년 사이에 찬술되었다.
(2) 『고운집』-최치원의 문집으로, 「신라가야산해인사선안주원벽기(新羅伽倻山海印寺善安住院璧記)」·「순응화상찬」에 순응과 이정의 행적과 해인사 창건 과정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900~904년 사이에 찬술되었다.
(3) 선림원종명-804년 제작되었으며, 강원도 양양군 서면 선림원 종을 주조할 때 상화상(上和尙) 순응이 참여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4) 「가야산해인사고적(伽倻山海印寺古籍)」-찬자는 미상이며, 943년 이후 찬술되었다. 순응과 이정의 행적 및 해인사 창건 과정을 기술하고 있으며 설화적 성격이 강하다.
(5) 『삼국사기(三國史記)』 권10 애장왕 3년 8월조-해인사의 창건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6) 「거제현우두산현암선사중수기(巨濟縣牛頭山見庵禪寺重修記)」-이색이 찬하였으며, 순응과 이정이 중국의 보지(寶志)의 법을 이어 우두산의 현암선사(見庵禪寺)를 창건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가야산해인사고적」을 참조한 것으로 추정된다.
순응과 관련된 자료는 그의 사후 100여 년이 지난 900년을 전후한 시기에 최치원에 의해 정리되었다. 순응의 활동에 대해서는 그의 전기인 『석순응전』이 가장 자세하겠지만, 전하지 않는다. 다만 「신라가야산해인사선안주원벽기」, 「가야산해인사고적」 등을 통해 개략적으로 정리할 수 있다. 우선, 순응은 부석사의 의상을 계승하여 부석적손(浮石嫡孫)으로 일컬어진 신림(神琳)에게 수학하였다.
신림은 의상의 십대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인 상원(相元)에게 배우고 또 당에 들어가 융순(融順)에게 수학하였다. 신림의 제자로는 순응 외에 법융(法融), 숭업(崇業) 등이 있었다. 즉, 순응은 의상-상원-신림으로 이어지는 의상의 4세손에 해당한다. 따라서 신라 화엄종의 초조(初祖)로 부석사를 창건한 의상을 계승한 화엄종 승려임이 분명하다.
순응은 766년 당에 가서 교종과 함께 선종을 익혔다[窮探敎海 俊達禪河]라고 한다. 당에서 구체적으로 누구에게 배웠는지 분명하지 않다. 「가야산해인사고적」에는 보지공의 제자들에게 수학하였다고 하나, 정확하지는 않다. 8세기 중엽 당시 중국에서는 선종으로 우두선(牛頭禪)이 널리 유행하였고, 화엄종에서도 선종의 영향을 많이 받은 징관(澄觀)이 활동하고 있었다. 순응은 중국 불교계의 영향을 받아 화엄학을 토대로 선종을 익히는 교선일치의 사상 경향을 지니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귀국하여 국가로부터 대덕(大德)에 엄선되었다. 정확한 귀국 시기는 알 수 없으나, 해인사를 창건하는 802년 이전인 것은 분명하다. 순응이 해인사를 창건하는 과정에 대해 「신라가야산해인사선안주원벽기」에는 애장왕의 조모인 성목태후의 귀의와 도움으로 802년 10월 16일 동지를 이끌고 가야산에 터를 잡아 건축하였다고 한다.
또, 설화적 성격이 짙은 「가야산해인사고적」에는 애장왕 왕후의 등창을 고쳐 준 것이 계기가 되어 해인사를 창건하게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즉, 「신라가야산해인사선안주원벽기」에는 성목태후, 「가야산해인사고적」에는 애장왕 왕후와의 인연으로 해인사를 창건하게 되었다고 적고 있다. 하지만 『삼국사기』에 의하면 성목태후는 799년 8월 성목태후로 추봉(追封)되었으므로, 그 이전에 세상을 떠났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애장왕은 13세에 즉위하여 805년 비(妃)인 박씨(朴氏)를 왕후로 삼았다고 하므로, 802년에는 왕후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는 애장왕의 숙부인 김언승(金彦昇)[훗날 헌덕왕]이 섭정을 하고 있었다. 따라서 해인사 창건과 관련된 위의 자료들은 새롭게 해석해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순응의 귀국 연대는 799년 이전, 대체로 790년대 중반 즈음인 원성왕 때였던 것으로 보인다. 귀국 후 순응은 신라 왕실로부터 높은 대우를 받으면서 한동안 왕실에 머물렀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 원성왕의 태자 인겸(仁謙)의 비인 성목태후의 귀의를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인겸은 791년 세상을 떠났으므로, 남편을 잃은 성목태후는 불교에 대해 관심이 높았던 것으로 쉽게 추측된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가정이 성립할 수 있다.
순응은 귀국 후 해인사를 창건할 뜻을 지니고 신라 왕실을 찾았다. 그리고 성목태후를 만나 귀의를 받고 해인사 창건에 대한 지원을 이끌어 내었다. 하지만 성목태후는 순응이 해인사 불사를 착공하기 전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즉, 802년에는 이미 성목태후가 세상을 뜬 뒤였으나, 성목태후의 유지를 이은 신라 왕실의 후원으로 해인사를 창건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마 애장왕의 조모이자, 섭정 김언승의 모친인 성목태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해인사 창건을 적극 지원하였던 것이 아닌가 한다. 그 때문에 최치원이 「신라가야산해인사선안주원벽기」를 찬술할 때 성목태후의 지원 아래 해인사를 창건한 것으로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신라가야산해인사선안주원벽기」에는 해인사의 창건 불사가 진행되던 802년 말경 순응이 갑자기 입적하자, 그 뒤를 이어 이정이 공사를 진행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804년 3월 23일 주조된 선림원종에 상화상(上和尙) 순응화상이 등장한다. 여기서 상화상은 수석(首席) 화상이란 뜻으로 추정된다. 순응은 804년 3월에도 생존해 있었으며, 그 이후에 입적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순응은 802년 해인사 창건 불사가 진행 중일 때 선림원으로 자리를 옮겼고, 그 뒤를 이어 동일한 가야 왕족의 후예이자 동문 후배인 이정이 해인사를 완공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로써 순응은 선림원종이 완성된 804년 이후 멀지 않은 시기에 입적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학문과 사상]
순응의 생애 중 정확하게 연대를 알 수 있는 때는 766년 당나라에 유학한 것과 802년 해인사를 창건하였다는 사실이다. 다수의 비문이 전하는 나말여초 선승들의 입당 유학 연령이 대체로 30대를 전후한 시기였다. 이에 비추어 보면 순응은 대략 730년대 중반에 태어났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가 태어난 730년 중반은 대가야가 멸망한 지 170여 년이 지난 때였다. 하지만 대가야의 고도인 고령과 합천 지역에는 대가야 왕족의 후손들이 여전히 어느 정도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의 집안은 아마도 5두품 정도에 준하는 신분의 지방 출신이었을 것이다. 요컨대 순응은 고령이나 합천 지역 출신으로 5두품에 준하는 지방 출신이었다.
골품제 사회에서 멸망한 국가의 왕족 출신이 갖는 신분적 한계는 충분히 생각할 수 있다. 이에 순응은 750년대 전반 신라 화엄종의 주류인 부석사로 출가하였던 듯하다. 그리고 그곳에서 의상의 손제자인 신림의 가르침을 받았다. 이로써 의상의 화엄을 계승한 4세의 화엄 승려가 되었다. 이후 766년 신라 중대의 마지막 왕인 혜공왕 때의 어수선한 상황에서 입당 유학을 결행하였다. 당에 입당한 그는 화엄학과 함께 우두선을 익히는 등 교선일치의 새로운 사상 경향을 수용하게 되었다.
순응은 30여 년의 유학 생활을 마치고 790년대 중반 즈음인 원성왕 때에 귀국하였다. 귀국 후 왕실로부터 높은 대우를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순응은 대가야의 건국 신화의 모태인 가야산 산록 아래에 위치한 정견모주의 사당을 주목하여, 그곳에 사원[해인사]을 창건하려는 뜻을 세웠다. 이에 신라 왕실을 찾아 원성왕의 태자로 요절한 인겸의 태자비인 성목태후를 만나 귀의를 받고, 해인사 건립에 대한 후원을 약속받았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선조인 월광태자가 신라 왕실과 혼인하여 태어났음을 강조하였을 법하다. 이렇게 하여 해인사 창건 불사를 추진하게 되었으나, 성목태후가 세상을 떠나자 애장왕과 당시 섭정인 김언승이 각각 자신의 조모이자 모친인 성목태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802년 해인사를 창건하는 데 적극적인 후원을 하였다. 해인사 건립 불사가 끝나기 전 순응은 선림원으로 주석처를 옮겼고, 나머지 공사는 이정이 맡아 완성하게 되었다. 순응은 선림원에서 804년 3월 선림원종을 주조하는 데 상화상으로 참여하였다. 그리고 선림원종이 완성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입적한 것으로 보인다.
순응과 관련된 자료가 부족하여 그의 저술이나 작품, 묘소 등은 알 수 없다. 다만, 그가 입적한 지 100여 년이 지난 900년경에 해인사에 머물던 최치원은 순응의 전기를 찬술하였다. 이때 해인사를 창건한 그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고, 또 그를 추모하는 사업이 진행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최치원의 『석순응전』과 「순응화상찬」은 그에 대한 재평가와 추모의 결과로 찬술된 것으로 여겨진다.
「신라가야산해인사선안주원벽기」에 ‘조사(祖師) 순응대덕(順應大德)’이라고 하여 그는 해인사를 창건한 조사로 평가되고 있다. 특히, 「순응화상찬」에는 그를 선재동자에 비유하여 높이 평가하였으며, 중국에 유학하여 진리를 체득(體得)하고 귀국하였고 화엄과 우두선을 익혀 선교일치의 사상 경향을 지녔으며 해인사를 창건한 사실을 찬미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