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90089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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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根壽 |
영어음역 | Yi Geunsu |
이칭/별칭 | 죽함(竹檻) |
분야 | 종교/유교,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효자·열녀 |
지역 | 경상북도 고령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하창환 |
성격 | 효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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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경상북도 고령군 덕곡면 예리 |
성별 | 남 |
생년 | 1832년 |
몰년 | 1886년 |
본관 | 성산 |
[정의]
조선 후기 고령 출신의 효자.
[가계]
본관은 성산(星山). 호는 죽함(竹檻).
[활동사항]
이근수(李根壽)[1832~1886]는 지금의 고령군 덕곡면 예리에서 태어났다. 집안이 가난하였지만 부모를 모시는 데 몸과 마음을 다하여 이웃의 칭송이 자자하였다. 아버지가 방안의 냉기와 습기로 말미암아 몸에 마비가 일어나는 풍비(風痺)에 걸려 생명이 위독하자 손가락을 베어 그 피를 마시게 하고, 매일 하늘에 간절히 기도하여 소생하게 하였다. 하지만 병의 후유증으로 아버지의 거동이 자유롭지 못하자 한시도 곁을 떠나지 않고 수발을 들었다.
이러한 와중에 뜻밖에도 자신의 아들이 중병에 걸려 세상을 떠났는데 몸이 불편한 아버지의 곁을 비울 수 없다며 아들의 장례에 가지 않았다. 또한 이 사실을 아버지가 알게 되면 상심할 것을 염려하여 집안사람들에게는 곡소리를 내지 말라고 분부하였다.
아버지를 간호하는 도중에 어머니가 갑작스런 병으로 생명이 위태롭게 되자 손가락을 베어 그 피를 마시게 하여 소생하게 하였으며, 아버지가 별세하자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실신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장례 후에는 비바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아침저녁으로 묘소에 참배하여 제물을 놓고 제사를 드렸다. 그리고 1876년(고종 13) 마을에 흉년이 들어 사람들이 끼니를 잇기 어렵게 되자 식구들이 겨우 연명할 양식만 남겨 놓고 이웃에게 나누어 주는 선행도 베풀었다.
[상훈과 추모]
효행이 알려져 나라에서 동지돈령부사(同知敦寧府事)에 추증하고, 정려를 내렸다. 만구(晩求) 이종기(李種杞)가 정려각의 기문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