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90087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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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孝子 |
영어음역 | Hyoja |
영어의미역 | Dutiful Son |
분야 | 종교/유교,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북도 고령군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이병훈 |
[정의]
경상북도 고령 지역에서 부모를 효성으로 극진하게 섬긴 자녀.
[개설]
효 사상은 삼국시대에 이미 전개되었다. 고구려에서는 태학(太學)에서 오경(五經)과 중국의 사서들을 교육하였고, 신라도 국학(國學)에서 『논어(論語)』와 『효경(孝經)』 등을 교육하였다. 고려시대에는 국자감(國子監)을 설치하여 유교 경전을 학습하고, 『논어』와 『효경』을 필수 과목으로 하여 유교적 충효 사상을 중시하였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효 관념은 정치적·사회적 규범으로 체계화되었고, 충효를 근본으로 하는 삼강오륜이 중요시되었다. 충효에 모범적인 삶의 모습을 보여준 이들의 행적을 통해 조선 사회는 풍속의 교화는 물론 사회를 안정시키는 통치력을 강화시켰다고 할 수 있다.
[인물]
고령 지역에도 효와 관련된 인물과 유적이 상당수 남아 있어 정치적·사회적 규범으로 자리 잡았던 효 사상의 영향을 알 수 있다. 18세기 중후반까지는 유교적 도덕규범에 의한 공경의 대상이 되는 인물들이 상대적으로 적었으나 그 이후에 효자는 물론 충신, 열녀와 같은 인물들이 늘어났다. 이 같은 경향은 정치적·사회적 규범으로서의 유교 관념이 사회 속에 자리 잡았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이다.
1. 강병관(姜炳觀)
본관은 진양(晉陽)이다. 1901년(고종 38)에 태어나 29세에 사망하였다. 9년 후 강병관의 아버지가 이질에 걸려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다. 그런데 그가 저승길로 접어들 때 강병관이 아버지를 살려 달라고 저승사자의 우두머리에게 간청했던 바, “너의 효성이 지극해서 놓아 주노라.” 하여 깨어났다는 아버지의 말에 마을 사람들이 죽은 후에도 효성이 지극하다 하여 효자비를 세워 주었다.
2. 곽유(郭逌)
본관은 현풍(玄風), 호는 월계(月溪)이다. 1690년(숙종 16)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부모의 병환에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먹여 소생하게 하였다. 상을 당해서는 법도에 어긋남이 없어 유림의 칭송이 높았다.
3. 권중정(權重正)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양여(養汝), 호는 이회(二晦)이다. 아버지의 병환이 깊어지자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먹여서 수명을 연장하였기에 향촌 사람들이 인후군자라 칭송하였다.
4. 김시사(金是泗)
본관은 일선(一善), 호는 매암(梅庵)이다. 김종직(金宗直)의 7세손이다. 9세에 아버지가 죽자 슬퍼하기를 어른과 같이하였고, 어머니의 등에 종기가 났을 때는 입으로 빨아 병을 낫게 하였다. 어머니의 상을 당해서는 슬픔이 지나쳐서 몸이 상해 쓰러지는 등 어린 나이에 효성의 지극하기가 으뜸이라 하여 칭찬이 자자했다. 효행으로 지평에 증직되었다.
5. 김영곤(金永坤)
본관은 경주(慶州), 호는 삼연(三然)이다.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여 한 번도 명을 거스른 적이 없이 한마음으로 섬겼으므로 이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 정려되었다.
6. 노지도(魯至道)
본관은 강화(江華), 자는 변이(變而)이다. 임진왜란 당시 왜적에게 잡혀 아버지와 함께 죽임을 당하는 순간, 아버지를 품에 안듯이 덮어 칼날을 막고, 사지가 잘리고도 적장에게 혈서를 써 던지고 불속에 뛰어들어 죽었다. 결국 아버지는 살아남았는데, 이 일이 널리 알려져 정려를 받았다.
7. 박윤(朴潤)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덕부(德夫), 호는 죽연(竹淵)이다. 현감 박계조(朴繼祖)의 아들로, 아버지가 죽자 여막을 짓고 예제를 다하여 유림의 칭송이 자자하였다.
8. 박문필(朴文弼)
본관은 순천(順天)이다. 부사 박윤서(朴閠緖)의 아들이다. 일찍이 무과에 등제하여 선전관을 지냈으며, 부모가 위급할 때 단지(斷指)하여 구하는 등 효성이 뛰어나 향리에서 추증하였다.
9. 배학조(裵學朝)
본관은 성산(星山), 자는 화일(華日)이다. 타고난 성품이 순검하고 사치한 생각을 하지 않으며, 부모에게는 효성이 지극하고 형제간에는 우애가 돈독해서 그 사적이 『동유학안(東儒學案)』에 실렸다.
10. 성풍세(成豊世)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노모를 모시고 성산 노곡으로 피난했다. 이후 군에 입대하여 상주에서 근무하는데, 낮에는 군무에 종사하고 밤이면 180리 길을 달려와 노모를 뵙고 아침식사를 마련해 주곤 돌아갔다. 이 효성에 하늘도 감동했는지 이 길을 호랑이가 등에 업어 도왔다고 한다. 또한 얼어붙은 물속에서 잉어를 구하거나, 엄동설한 눈 속에서 대추를 구하기도 하였으며, 산 꿩이 스스로 날아와 떨어지는 등 효심이 지극하여 그 어머니가 장수하였다.
11. 신급(申汲)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여인(汝引)이다. 어머니 병환에 피를 내어 약에 쓰고 장례 후에는 무덤 아래서 비바람을 무릅쓰고 슬피 우니, 마을 사람들이 여막을 지어 주고 죽을 쑤어 주었다. 1729년(영조 5)에 이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 호조좌랑에 증직되었다.
12. 오상옥(吳相玉)
본관은 고창(高敞), 자는 국서(國瑞), 호는 국포(菊圃)이다. 문장에 능숙하고 부모에 대한 효심도 지극했다. 어머니의 병환에 의원이 인분을 먹이라 하기에 미리 맛보고 드려 효험을 얻으니 사람들이 감동하였다. 이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 이조참의에 증직되었다.
13. 유경해(兪景海)
본관은 기계(杞溪)이다. 1501년(연산 7)에 태어났다. 효성이 지극하여 14세 때 아버지가 등창을 앓을 때 입으로 빨아 효험을 얻었고, 운명 직전에는 손가락을 잘라서 그 피를 먹여 수명을 연장케 하였으며, 상을 당해서는 3년간 시묘하니 사림에서 표상하였다.
14. 이근수(李根壽)
본관은 성산(星山), 호는 죽함(竹檻)이다. 1832년(순조 32)에 덕곡면 예리에서 태어났다. 부모가 병환에 걸리자 손가락을 잘라서 그 피를 먹였으며, 아들이 중병에 걸려 죽었지만 아버지의 병환을 살피느라 곁을 떠나지 않았다. 1876년(고종 13) 흉년이 심하게 들자 식구들이 먹을 양식만 남겨 놓고 가난한 이웃에 곡식을 나누어 주기도 하였다. 이러한 행적이 관가에 알려져 효자각이 세워졌다.
15. 전주국(全柱國)
본관은 죽산(竹山), 자는 이지(以之), 호는 경모재(敬慕齋)이다. 아버지의 상을 당해 3년간 여묘 생활을 하고, 바로 어머니가 죽자 다시 3년간 여묘 생활을 하였다. 국상이 있자 산에 올라가 3일 동안 밤낮으로 북쪽을 향해 곡하였다. 이 사실이 조정에 전해져 1711년(숙종 37) 특제강릉참봉(特除江陵參奉)에 증직되고 호세 3결을 면제받았다.
16. 정사현(鄭師賢)
본관은 진양(晋陽), 호는 월담(月潭)이다. 정인(鄭麟)의 아들이다. 9세에 아버지가 죽자 어른과 같이 슬퍼했고, 정성을 다하여 어머니를 섬기매 효성이 널리 알려졌다.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문하에서 수학했으며, 영연서원에 제향되었다.
17. 조성린(趙性麟)
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현서(玄瑞), 호는 소은(蘇隱)이다. 1858년(철종 9) 성산면 오곡리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총명과 효심이 남달랐으며, 학업에 충실하였다. 1900년(고종 37)에 어머니가 학질에 걸려 사경에 이르게 되자 자신의 허벅지살을 베어 약을 조제하여 올렸더니 효험을 얻어 어머니의 병이 낫게 되었다. 오곡동 입구에 효자비가 서 있다.
18. 허항(許伉)
본관은 분성(盆城)이다. 허명신(許命申)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효성이 지극하여 어머니가 병환에 있을 때 꿩고기를 원하니 꿩이 부엌으로 날아들고 물고기를 먹고 싶어한즉 얼음 위에 고기가 뛰어오르는 기이한 현상이 있었다. 어머니가 죽자 3년간 여묘 생활을 하였다. 현종 조에 이 일이 알려져 정려를 세우게 하였다.
[관련 유적]
성산면 오곡리 산112번지에 조성린 효자비각(趙性麟 孝子碑閣)이 세워져 있으며, 다산면 나정리 127번지[나선로 292]엔 성풍세 효자비(成豊世 孝子碑)가 세워져 있다. 또한 덕곡면 예리 230번지엔 이근수 효자각(李根壽 孝子閣)이 세워져 있고, 다산면 벌지리 986번지엔 김영곤 정려문(金永坤 旌閭門)이 세워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