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9008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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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尹陽來 |
영어음역 | Yun Yangrae |
이칭/별칭 | 계형(季亨),회와(晦窩),익헌(翼獻)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고령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병훈 |
[정의]
조선 후기 고령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계형(季亨), 호는 회와(晦窩). 할아버지는 윤지선(尹止善)이고, 아버지는 경주부윤 윤리(尹理)이다.
[활동사항]
윤양래(尹陽來)[1673~1751]는 1699년(숙종 25) 진사를 거쳐, 1708년(숙종 34)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정원주서(承政院注書)에 초임되었는데, 이때 글씨를 빨리 써서 비주서(飛注書)라는 별명을 들었다. 그 뒤 사헌부지평·사간원정언 등을 역임하였고, 1716년(숙종 42) 세자시강원문학·세자시강원필선·사간원헌납·사헌부집의를 거쳐 이듬해 경상우도 암행어사로 나갔다가 돌아와 세자시강원보덕을 지냈다.
1720년(숙종 46) 승정원승지·병조참의·승정원우부승지를 거쳐 1721년(경종 1) 충청도관찰사로 재직 중에 왕명을 어겨 효수형을 받게 된 박세명(朴世明)을 두둔하였다는 죄로 파직되어 국문을 받았으나, 곧 석방되어 동지겸주청부사(冬至兼奏請副使)로 청나라에 갔다. 이듬해 청나라에 가서 경종의 병약함을 발설하였다는 죄목으로 파직된 뒤 갑산에 위리안치되었다. 1725년(영조 1) 노론이 재집권하면서 풀려나 승정원승지가 되었고, 이어 공조참판을 거쳐 사간원대사간으로 재직 중 윤심형(尹心衡)의 논척(論斥)을 받고 영월부사로 나갔다가 곧 병조참판이 되었다.
그 뒤 안동부사를 거쳐 1729년(영조 5) 예조와 병조의 참판,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 등을 역임하였고, 1730년 함경도관찰사, 1732년 한성부우윤·경상도관찰사·승정원도승지·평안도관찰사·한성부판윤을 거쳐 형조판서·공조판서·호조판서·사헌부대사헌을 지냈다. 1741년(영조 17) 의정부좌참찬을 받아 아경(亞卿)[종2품 벼슬을 높여 이르던 말]의 지위에 올랐다. 1743년(영조 19) 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가 되었고, 기로소에 들어갔다.
1746년(영조 22)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로 있을 때 유생 60여 명과 연명 상소로 소론 박문수(朴文秀) 등이 탕평론을 벌이면서 신임사화에 관련된 소론을 뿌리 뽑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가 한때 삭직되었다. 이해에 판돈령부사로 치사하고 봉조하(奉朝賀)[종3품(從三品)의 벼슬아치가 사임한 뒤 특별히 준 벼슬]가 되었다. 만년에 노론으로서 분란을 일으켰으나, 경사에 밝고 글씨를 잘 썼다.
[저술 및 작품]
글씨로는 영상윤인경비(領相尹仁鏡碑)와 엄흥도묘갈(嚴興道墓碣) 등이 있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익헌(翼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