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9006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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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翰林臺 |
영어음역 | Hallimdae |
영어의미역 | Hanrimdae Stone |
분야 | 지리/자연 지리 |
유형 | 지명/자연 지명 |
지역 | 경상북도 고령군 쌍림면 용리 상용마을 |
집필자 | 류영철 |
[정의]
경상북도 고령군 쌍림면 용리 상용마을 입구에 있는 자연 바위.
[개설]
대가야읍에서 국도 26호선을 따라 쌍림면으로 가다 보면 우측으로 반룡사로 진입하는 도로가 나온다. 이 길을 따라 월막리를 지나면 반룡사 방향과 용리 상용마을로 향하는 갈림길이 있다. 갈림길 좌측으로 상용마을 방향으로 난 길을 따라 올라가면 상용마을 입구에 큰 느티나무가 있다. 느티나무의 좌측으로 20m 정도 떨어진 곳에 큰 바위가 하나 있는데, 이곳이 한림대이다.
[명칭유래]
한림대는 고려 무인정권기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지낸 이인로(李仁老)[1152~1220]가 월막리에 머물면서 이곳에서 놀았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인로가 어떻게 고령 지역과 인연을 맺고, 월막리에 머물면서 한림대에서 노닐었을까?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29, 고령현 불우조의 반룡사 조항에 다음과 같은 시가 실려 있다.
“봄은 갔건만 꽃은 아직 남아 있고/ 하늘은 개었건만 골짜기는 스스로 그늘졌구나./ 소쩍새는 대낮에도 울어대니/ 비로소 심산유곡에 복거하고 있음을 깨닫겠노라.[春去花猶在 天晴谷自陰 杜鵑啼白晝 始覺卜居深]”
이인로가 반룡사에서 시를 읊었다는 사실에서 그가 한림대 인근에 위치한 반룡사를 찾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반룡사는 이인로의 숙부[大叔]이었던 요일(寥一)이 주지하면서 화엄결사를 펼쳤던 곳이다. 최해(崔瀣)의 『졸고천백(拙稿千百)』 권1, 「송반룡여대사서(送盤龍如大師序)」를 통해 그러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반룡정사는 내가 아직 보지 못했다. 젊어서 이미수(李眉叟)[이인로]의 시를 뒤져보니 시집 가운데 그의 대숙 사리(闍梨)와 더불어 주고받은 작품이 있었는데,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었다……처음에 사리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고 다만 몸을 맡겨 승려가 되었고, 행의가 독실하여 사대부가 미치지 못하는 인물 정도로 생각했다. 후에 이씨의 종인을 만나 물어본즉, 실로 반룡사(盤龍社)를 개창한 자는 승통(僧統) 일공(一公)이었다. 반룡사는 불학자(佛學者)들이 자포자기에 빠져있음을 불쌍히 여겨 그들을 격려하기 위해 세운 것이라 하니, 그 배움에 힘을 기울인 것이 적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그 문도들이 대대로 법을 지켜 타락하지 않아 반룡사는 지금까지 동방의 화엄대도량(華嚴大道場)이 되었다…….”
요일(寥一)은 고려 명종의 두터운 신임을 얻어 조정에 자유로이 출입할 수 있었던 위치에 있었다. 또 시재에도 뛰어나 그의 작품이 『파한집』에 수록되어 있다. 요일은 화엄종의 대표적인 사찰인 흥왕사(興王寺)의 승통이었다. 1197년(명종 27) 9월에는 두경승(杜景升)이 관련된 최충헌(崔忠獻) 모반 사건에 연루되어 영남으로 유배된 것으로 보인다. 요일은 아마 이 즈음에 영남으로 내려와 반룡사에 주석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요일이 개경을 떠나 경상도의 고령으로 내려와 반룡사를 개창한 것은 13세기 초엽 무렵이었다. 요일이 반룡사의 화엄결사를 개창한 이유는, 불학자들이 자포자기에 빠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고 하였다. 당시는 정치적으로는 무인 정권의 최충헌이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으며, 전국적으로 농민 항쟁이 발생하여 혼란이 가중되고 있었다. 불교계 역시 승려들이 정쟁에 개입하고 있었으며, 기복적 성격의 도량이 많이 개설되어 있었다.
이인로는 일찍이 부모를 여의어 대숙인 요일이 키웠다고 한다. 이인로가 요일이 반룡사에 머물게 되자 고령을 찾았고, 그 과정에서 반룡사 시를 남겼을 것이다. 어쩌면 반룡사 아래 마을인 월막리에 머물면서 용리에 있는 한림대를 찾아 노닐기도 했을 법하다. 그러면서 무인 정권 하에서 억압받던 요일과 자신의 심정을 토로하였을 것이다. 그가 지은 반룡사 시에는 이러한 그의 심정이 잘 나타난다.
[자연환경]
한림대는 특별히 다듬거나 가공한 흔적이 없는 화강암의 자연 바위이다. 크기는 큰 편으로, 길이 550㎝, 높이 150㎝, 폭 360㎝ 정도 된다. 주변에는 잡목이 자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