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90058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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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文淵書院遺墟碑 |
영어의미역 | Monumental Stone for The Site of Munyeon Confucian Academy |
분야 | 역사/근현대,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비 |
지역 | 경상북도 고령군 우곡면 도진리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박병선 |
성격 | 비석|유허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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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립시기/일시 | 1940년 |
관련인물 | 박윤|박택|윤규|박정번|최여설 |
재질 | 화강암 |
높이 | 185㎝[비신] |
너비 | 70㎝[비신] |
소재지 주소 | 경상북도 고령군 우곡면 도진리 |
[정의]
경상북도 고령군 우곡면 도진리에 있는 문연서원의 사적을 기록한 비석.
[개설]
고령군 우곡면 도진리 문연서원 터의 문연서원은 1695년(숙종 21)에 학암(鶴巌) 박정번(朴廷璠)의 강학지소(講学之所)로 건립하여 죽연(竹淵) 박윤(朴潤), 낙락당(樂樂堂) 박택(朴澤), 월오(月塢) 윤규(尹奎), 학암(鶴巌) 박정번(朴廷璠), 매헌(梅軒) 최여설(崔汝楔)의 5현을 향사(享祀)하였으나 1868년(고종 5) 훼철하였다 한다. 그러나 지금은 그 후손들이 매년 제사를 지내고 있으며 그 업적을 기록한 문연서원 유허비가 있다.
[건립경위]
조선시대 선비인 윤규는 많은 문생을 교육시켰고 국가에도 공을 세워 임진왜란 때 문생들과 같이 왜병과 대적하여 용전분투하다가 1593년(선조 26)에 장렬하게 전사하였으며, 박택은 남명(南冥) 조식(曺植), 배신(裵紳) 등과 교우하여 도의를 높이고 학문의 지평을 넓혔으며 효성과 덕행 또한 뛰어났다.
박정번은 임진왜란 때 형 박정완과 더불어 왜구와 대항하여 싸웠고 왜란이 끝나고 공을 논할 때 자신의 공적은 드러내지 않고 형만을 내세우는 덕성이 있었으며, 박윤은 선조 조에 효행으로, 최여설은 임진왜란 때 창의하여 전공을 세웠으므로 문연서원에 제향하였다.
그 후 5현의 후손이 모여 의논하기를 “서원이 철폐된 지 73년이 지난 지금 선현들의 공적을 기록하여 남기지 않으면 후대에 가서 이들의 공적을 밝힐 수가 없기 때문에 공적을 기록한 비를 건립하여야 한다.”고 하니 모두가 비를 세우는 데 찬성하였다. 이에 최순곤, 박중열, 박우열, 박재희, 박인회, 박의회가 대표가 되어 1940년에 문연서원 유허비를 세웠다. 비문은 서원 정종호가 짓고 야성(冶城) 송홍래(宋鴻来)가 썼다.
[위치]
대가야읍에서 지방도 67호선을 따라 가다가 우곡면 소재지 입구 도진교 직전 왼쪽 도로가에 위치해 있다. 문연서원 유허비가 있는 앞쪽으로 회천강이 흐르고 왼쪽으로는 우곡면 소재지인 도진리가 있다.
[형태]
문연서원 유허비는 비석의 전형적인 형태로 귀부와 비신, 직사각형의 이수로 구성되어 있는데, 비신의 전면에 ‘문연서원 유허비(文淵書院遺墟碑)’가 크게 음각되어 있고 삼면에 사적이 기록되어 있다. 크기는 비신의 경우 높이가 185㎝, 폭 70㎝, 두께 37㎝이며, 이수는 높이 85㎝, 폭 104㎝, 두께 56㎝로 이수에는 여의주를 다투는 두 마리 용이 조각되어 있다. 귀부의 거북은 생김새나 모양이 조금 미숙한 느낌이 든다.
[현황]
문연서원 유허비가 위치한 앞쪽에는 4기의 비석이 있는데, 왼쪽부터 도계 박기언공 교행비(桃渓朴基彦公教行碑), 증 숙인 함안조씨 정려 유적비(贈淑人咸安趙氏旌閭遺蹟碑), 증 이조참판 양죽당 박공 기적비(贈吏曹参判養竹堂朴公紀蹟碑), 죽연 박선생 효행 정려 유허비(竹淵朴先生孝行旌閭遺墟碑)이며, 도진 마을에 죽연 박윤의 죽연정사(竹淵精舎)와 낙락당 박택의 낙락당(樂樂堂)이 있는 것으로 보아 도진리가 고령박씨 집성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문연서원 유허비는 이들 4기의 비석에 밀려 뒤쪽에 배열되어 있으나 주변이 깨끗하게 잘 정리가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