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900576 |
---|---|
한자 | 徐昌圭-金昌鉉功德碑 |
영어의미역 | Memorial Monument for Seo Changgyu and Gim Changhyeon |
이칭/별칭 | 탁호미산서공창규지호덕비,전참봉김창현시혜비 |
분야 | 역사/근현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비 |
지역 | 경상북도 고령군 쌍림면 백산리 산 3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용만 |
[정의]
경상북도 고령군 쌍림면 백산리에 있는 서창규와 김창현의 공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
[건립경위]
서창규·김창현 비는 각각 탁호미산서공창규지호덕비(卓乎眉山徐公昌圭之好徳碑)와 전참봉김창현시혜비(前参奉金昌鉉施恵碑)라고 부른다. 이 비들은 서창규·김창현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지역 주민들이 건립하였다.
[위치]
서창규·김창현 비는 나란히 백산리 마을 민가 뒤 암반 위에 있다. 지금은 접근로조차 막혀 민가로 들어가 암반에 걸쳐진 사다리를 타고 어렵사리 올라가야 한다.
[형태]
서창규 비는 3단으로 몰딩된 농대 위에 비신을 세우고 지부돌[가첨석]을 얹은 형태이며, 규모는 비신 높이 97㎝, 너비 36㎝, 두께 12㎝, 농대 높이 35㎝, 너비 50㎝, 두께 15㎝, 지붕돌 높이 37㎝, 너비 60㎝, 두께 35㎝이다.
김창현 비는 농대 위에 비신을 세우고 지붕돌을 얹어 놓은 형태이며, 비신 양측으로 지붕돌과 농대를 이어 놓은 폭 14㎝ 정도의 돌기둥을 2개씩 4개를 호석으로 놓았다. 규모는 비신 높이 90㎝, 너비 32㎝, 두께 15㎝, 농대 높이 53㎝, 너비 100㎝, 두께 25㎝, 지붕돌 높이 59㎝, 너비 80㎝, 두께 45㎝이다.
[금석문]
서창규 비는 ‘탁호미산서공창규지호덕야(卓乎眉山徐公昌圭之好徳也)’라고 비석 전면에 대자(大字)로 새겼으며, 후면의 소자(小字)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정직한 군자이고 농사에도 선생이라 가을에는 면의 세금을 부담하고 봄에는 씨앗을 주며, 들판을 개척하여 궁한 사람을 구제하는데 부자라도 이러할까? 요순의 풍년이 여기로다 몸가짐은 결백하고 마음씨도 어질도다. 많은 덕을 찬송하여 돌을 갈아 새기노라(正直君子指導農師秋担面税春賜種資沃野開斥窮蔀頼支范金雖異尭麦可比処身廉潔率性仁慈為頌清徳鍊石銘詩)”.
건립과 관련해서는 ‘경오칠월일쌍동면소작인함송(庚午七月日雙洞面小作人咸頌)’이라 하였다. 현재 비석이 있는 곳은 쌍림면이지만 비를 세울 당시는 쌍동면과 임천면이 따로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후일 이 두 개의 면이 합쳐져서 쌍림면이 되었다.
김창현 비는 ‘전참봉김창현시혜비(前参奉金昌鉉施恵碑)’라고 비석 전면에 대자로 새겼으며, 그 우측과 좌측에는 그의 공적을 새겼다. “금관화족주궁고의어고유한신금무비불문□경구민기수혜차어갈륵피귀두(金官華族賙窮高義於古有罕矧今無比不問□罄 覯悶箕収恵此魚碣勒彼龜頭)”라 하였다. 판독이 어려운 글자는 육안으로 보기에 삼석목(三石木)을 세로로 붙여 한 자로 써 놓은 것 같으나 확실하지 않다. 별도의 고증이 필요하다.
[현황]
현재 서창규·김창현 비는 도로변에 민가가 들어서면서 접근로가 없고 도로에서 잘 보이지 않으며 잡초가 무성하여 보존 관리에 문제가 많다.
[의의와 평가]
서창규 비는 제목이 ‘탁호미산서공창규지호덕야(卓乎眉山徐公昌圭之好徳也)’라 하여 현감 등의 공식적인 영세불망비 등과는 내용이 다르다. 특히 서창규의 소작인 일동이 그의 인품에 감복하여 세운 비라는 데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