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90056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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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延詔里王井 |
영어의미역 | King's Well of Yeonjo-ri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유적(일반) |
지역 | 경상북도 고령군 대가야읍 연조리 145-1 |
시대 | 고대/삼국 시대/가야 |
집필자 | 정동락 |
성격 | 생활유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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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식 | 말각방형|원형 |
건립시기/연도 | 가야시대 |
높이 | 90㎝[상단]|20㎝[하단] |
둘레 | 130㎝ 내외[상단]|100㎝ 내외[하단] |
소재지 주소 | 경상북도 고령군 대가야읍 연조리 145-1 |
소유자 | 고령초등학교 |
[정의]
경상북도 고령군 대가야읍 연조리 고령초등학교에 있는 대가야시대 어정.
[건립경위]
고령 지역에는 대가야시대부터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우물이 여럿 남아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현 남쪽 1리에 대가야 궁궐지가 있고 그 옆에 돌우물이 있는데 세상에서 어정(御井)이라 전한다”라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개항기 고령 지역의 유학자인 홍와(弘窩) 이두훈(李斗勳)이 1910년(순조 4)에 편찬한 『고령지(高靈誌)』에는 “읍내에 어정이라 하는 것이 둘이 있다. 하나는 관아(官衙) 남쪽 1리에 있고, 다른 하나는 관아 북쪽 활 한 마당 거리에 있는데 왕후정(王后井)이라 한다. 전설에 따르면 대가왕식정(大加耶王食井)이라 부른다”고 한다.
연조리 왕정은 이두훈이 말한 관아 북쪽의 왕후정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또 발굴 조사를 통해 연조리 왕정의 퇴적층 최하층에서 대가야시대 토기편이 다수 출토되었다. 이러한 사실로 보아 이 우물은 대가야시대에지 소급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위치]
고령초등학교 운동장의 서쪽 모퉁이에 있다. 이곳은 대가야읍 중심지에 위치한 쾌빈리 공영 주차장에서 북쪽으로 400m 정도 떨어져 있으며, 대가야읍의 진산인 주산의 동쪽 지맥 하단에 해당한다.
[형태]
발굴 조사를 통한 우물의 형태는 말각방형 내지 원형이었으며, 크기는 상단이 높이 90㎝ 미만, 복원 내경 130㎝ 내외이고, 하단은 높이 약 20㎝, 복원 내경 100㎝ 내외로 추정되었다. 현재는 우물의 석축을 복원한 다음 동쪽 입구만 트고 나머지 세 방향은 막아 두꺼운 판석으로 뚜껑을 덮어놓았다. 이는 1917년 당시의 모습을 재현한 것이다. 현재는 주위에 팔작지붕의 보호각을 건립하였고, 철책을 둘러 보호하고 있다.
[현황]
연조리 왕정은 1977년 12월 13일에서 15일까지 3일간 계명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발굴, 조사되었다. 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이 우물의 주변 지반은 원래 논이었던 까닭에 찰진 점토로 이루어졌으며, 생토층은 잔자갈이 다량으로 섞여 있는 니토질(泥土質)이었다고 한다. 토층은 모두 7층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지표에서 제4층까지는 교란층이었고, 제5층 이하가 교란되지 않은 순수 유물 포함층이었다.
제5층에서는 백자편을 비롯한 분청사기, 옹기편이 출토되었고, 그 밖에 기와편 등이 섞여 있어 조선시대 전기부터 형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제6층에서는 회색 경질토기편과 와편이 집중적으로 출토되었다. 이로 보아 이 우물지의 연대가 적어도 가야시대까지 소급됨을 알 수 있다고 한다. 제7층은 생토층으로 흙 속에 잔자갈이 다량 포함되고 있어 지하수가 흐를 요소를 갖추고 있는데, 이 층에서 물줄기가 솟아나고 있었다고 한다.
출토 유물은 긴목항아리편 1점, 짧은목항아리편 1점, 환형파수 1점, 적색 연질토기편 1점, 그릇 손잡이 3점, 토구 1점, 와편 다수와 연석, 그리고 남근석형 석기가 각각 1점씩이 출토되었다. 현재는 발굴 조사를 토대로 일제강점기 때의 조사 보고서와 사진 등을 이용하여 재현해 놓았다.
[의의와 평가]
연조리 왕정은 이두훈이 말한 관아 북쪽의 왕후정을 말하는 것이 분명하다. 어정은 1977년 발굴 조사 후 일제강점기인 1917년에 조사된 것과 유리 원판 사진을 토대로 복원을 해두었다. 그리 깊지는 않지만 사철 일정하게 샘솟는 이 우물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나오는 어정은 아니지만 대가야의 어정 가운데 하나는 분명한 듯하다. 1,500년 동안 쉼 없이 흘러나오는 샘물처럼 아득히 먼 옛날 대가야시대 왕이 나라의 안녕을 기원하는 제의를 올릴 때 몸을 씻었을 수도 있고, 대가야 궁녀들이 물동이를 이고 와서 물을 긷던 곳이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