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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900504
한자 山城
영어의미역 Fortress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북도 고령군
집필자 류영철

[정의]

경상북도 고령군 지역에서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흙이나 돌로 쌓아 만든 방어 시설.

[개설]

성곽(城郭)이란 내성(內城)과 외곽(外郭)을 함께 이르는 말이다. 시가지 전체를 에워싼 나성(羅城)을 ‘곽’이라고 한다면, 그 곽의 안쪽에 또 다른 성벽으로 둘러싸 있는 독립된 공간을 ‘성’이라고 한다. 나라를 뜻하는 국(國)이란 말이 성곽[口]을 창[戈]으로 지키고 있는 형상을 한 데서도 알 수 있듯 성곽은 국가의 출현과 밀접한 관련을 지닌다.

성은 축조하는 재질에 따라 토성(土城), 석성(石城), 토석혼축성(土石混築城) 등으로 나뉜다. 우리나라 성은 도성(都城)·읍성(邑城)·산성(山城)·행성(行城)[일명 장성(長城)] 등으로 나눌 수 있는데, 그 중에서도 산성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아 우리나라를 ‘산성의 나라’라고 부르기도 한다. 산성은 외적의 침입을 방어하고 영토를 보존하기 위해 지리적 요충지에 축조하는 전략적인 요새로서 기능하였다. 더 나아가 경우에 따라서는 지방 행정 통치의 중심지로서의 역할도 하였다.

[연원 및 형태]

우리나라 산성의 기원은 위만조선(衛滿朝鮮)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삼국지(三國志)』에는 부여(夫餘)와 삼한(三韓)에 성곽이 있다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고구려는 산을 의지하여 성을 축조했기 때문에 쉽게 함락할 수 없다.”고 하여 산성의 효용성을 잘 설명하고 있다. 그 외에도 『삼국사기』에는 삼국의 수많은 축성 기사가 수록되어 있는데, 이처럼 우리나라는 삼국 이래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산성을 거점으로 한 산성 방어 체계를 구축함으로써 외부 세력의 침략에 대비하였다.

산성의 형태는 주로 산성이 위치한 입지 조건과 성벽의 통과선이 구체적으로 택하는 지형에 대한 이용 방법 등을 기준으로 형식적으로 크게 테뫼식[山頂式], 포곡식(包谷式), 복합식(複合式) 산성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테뫼식은 산봉우리를 둘러싸서 성벽을 구축한 것을 말하며, 포곡식은 성 내에 1개 혹은 그 이상의 계곡을 포용하고 그 주위를 둘러싼 산줄기의 능선을 따라 성벽을 만드는 것을 말한다. 복합식은 테뫼식과 포곡식의 두 가지 형식이 결합하여 성립된 유형을 말한다.

[문헌 자료로 본 대가야시대 산성]

고령 지역에 성곽이 축조되기 시작한 시기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다만, 고령 지역에는 삼한시대에 변한에 속한 반로국(半路國)이 존재했고, 『삼국지』에 삼한시대부터 성곽이 수축되었다고 기술되어 있어, 빠르면 삼한시대부터 성곽이 축조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현재까지 고령 지역에서 확인된 성곽 중 가장 이른 시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것은 다산면월성리 토성이다. 월성리 토성은 해발 44m 정도 되는 낙동강 변의 야산인 발산의 정상부를 감싸면서 축조되어 있다. 남쪽 성벽의 일부가 절개되어 있는데, 대략 2m 정도의 높이로 자연 암반 경사면 위를 평평하게 판축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절개면의 토축부와 토성 내부에서 4세기 대의 승석타날문 토기편이 확인되었다. 이처럼 월성리 토성은 토성으로 축조 방식이 판축인 점, 고령 지역에 위치한 여타의 산성보다 규모가 소형인 점, 강안 언덕의 독산에 생활공간과 비교적 인접하여 입지한 점, 4세기 대의 토기편이 출토되고 있는 점 등에서 비교적 이른 시기에 축조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고령 지역에 본격적으로 성곽을 쌓기 시작한 것은 대가야시대부터이다. 문헌 자료 상 나타나는 대가야의 축성 관련 자료는 『삼국사기』의 대가야 멸망 기사이다. 562년 대가야의 멸망 기사에 따르면 궁성의 출입문에 해당하는 전단문(栴檀門) 혹은 전단량(栴檀梁)이 건립되어 있었다. 특히 대가야에서는 문(門)을 양(梁)이라고 했는데, 양은 ‘교량·다리·들보’의 의미를 지닌다. 이로 미루어 대가야의 궁성은 성곽 주변으로 커다란 구덩이인 해자를 파고 그 속에 물을 채운 다음 통행을 위한 교량을 건설했던 것으로 보인다.

대가야시대의 궁성지로 전해 오는 곳은 현재 교령향교가 위치한 연조리 일대이다. 지난 2000년 8월 이 지역에 대한 시굴 조사 결과 건물지와 구덩이 등 7기의 유적과 대가야시대의 토기를 비롯한 다수의 기와와 벽돌 등이 출토되었다. 특히 이른바 ‘대벽건물지(大壁建物址)’가 확인되었는데, 대벽건물지는 밖에서는 기둥이 보이지 않는 큰 벽으로 된 건물을 말한다. 이러한 형태의 건물은 가야 지역에서는 드물고 신라나 백제에서도 궁전이나 절터에서만 확인된다고 한다. 이로 보아 이 지역이 대가야시대 궁성지가 분명한 듯하나, 그 구체적인 범위나 성벽 등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다음으로 대가야가 산성을 축조하여 외적의 침략에 대비하고 자기 세력권을 정비하려고 했던 사실은 『일본서기(日本書紀)』에서도 확인된다. 513년을 전후해 백제와 대가야가 기문(己汶)[남원] 지역을 둘러싸고 대립하는 과정에서 산성을 쌓아 대항했다는 것이다. 즉, 514년 3월에 대가야는 “자탄(子呑)[진주]과 대사(帶沙)[하동]에 성을 쌓아 만해(滿奚)[광양]에 이어지게 하고, 봉수대와 식량 창고를 만들어 백제와 왜국의 압박에 대비하였다. 또한 이열비(爾列比)[의령]와 마수비(麻須比)[영산]에도 성을 쌓아 마차해(馬且奚)[삼랑진]와 추봉(推封)[밀양]에까지 뻗쳤으며, 사졸과 무기를 모아 신라를 공박하였다.”고 한다.

여기서 자탄-대사-만해로 이어지는 산성의 연결망은 백제의 공격에 맞서기 위한 대가야의 서쪽 권역에 대한 방어망이며, 이열비-마수비-마차해-추봉의 산성 연결망은 동쪽의 신라의 침입을 견제하기 위한 방어 체계이다.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이들 지역의 정확한 위치 비정은 차치하고라도 대가야가 산성을 통한 방어망을 구축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삼국사기』에는 고령 지역에 위치했던 것으로 보이는 이산성(耳山城)과 가혜성(加兮城), 그리고 성열성(省熱城) 등이 기록되어 있다. 먼저 이산성은 673년(문무왕 13) 9월에 축조했다는 기록과 지리지의 ‘유명미상지분(有名未詳之分)’, 즉 이름만 있고 어디인지 알 수 없는 곳으로 수록되어 있다. 여기서 언급된 이산성은 현재 고령읍주산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대가야시대 이후 신라 문무왕 때 새롭게 수축했음을 파악할 수 있다.

가혜성과 성열성은 644년(선덕왕 13) 백제와 신라가 낙동강 유역의 7개 성을 둘러싼 쟁패 과정에서 등장한다. 우선 가혜성은 『삼국사기』 지리지에 보이는 고령군의 영현인 신복현(新復縣)의 옛 이름이 가시혜현(加尸兮縣)이므로 이를 지칭한 것으로 보인다. 신복현은 현재 고령군 우곡면 일대로 비정되므로, 가혜성은 우곡면 일대에 있었던 낙동강 변의 성으로 보인다. 따라서 가혜성은 현재 우곡면 도진리에 위치한 도진리 산성으로 비정할 수 있다.

다음으로 성열성은 대가야 가실왕의 명으로 가야금과 가야금 곡을 작곡한 우륵(于勒)의 출신지인 성열현(省熱縣)과 동일한 곳으로 보인다. 이 성열현의 위치에 대해서는 경상남도 의령군 신반, 대구광역시 동구 불로동, 경상남도 거창군 가조면, 충청북도 제천군 청풍면 등의 견해들이 표출되어 있다. 최근에는 고령군의 어느 지역, 특히 고령군 성산면 지역이라는 연구 성과도 제출되어 있다. 이에 의하면 성열성은 현재 성산면무계리 산성일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이상의 문헌 자료를 통해 대가야는 왕도에 왕성을 비롯해 경상남도와 전라도 지역에까지 이른 대가야 권역에 산성과 봉수를 축조하여 신라와 백제의 침입에 대비하는 산성 방어망을 구축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문헌 자료를 통해 당시 대가야의 도읍이었던 고령 지역에도 궁성과 이산성[주산성], 가혜성[도진리 산성], 성열성[무계리 산성(?)] 등의 산성을 확인할 수 있다.(표1 참조)

[고령 지역 산성 분포 및 특징]

고령 지역에서 현재까지 지표 조사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성곽은 모두 18개소이다. 이들 성곽들은 다소 이견이 있을 수 있으나, 대부분 대가야시대부터 축성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 중 대가야의 궁성이었던 평지성인 대가야 궁성지와 월성리 토성을 제외하고는 모두 산성이다. 따라서 고령 지역의 성곽은 거의 대다수가 산성이었던 셈이다.

고령 지역 산성의 축성 시기는 대가야시대 이후 신라에 의해 재사용되었고, 고려와 조선을 거치면서 오랜 기간 활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조선시대 임진왜란 당시에는 지역의 의병들에 의해 수축된 경우도 많았다. 그리고 망산성의봉산성, 미숭산성, 봉화산 등은 내부에 조선시대의 봉수가 설치되어 있다.

고령 지역 산성의 읍면별 분포 현황을 보면, 대가야읍에는 대가야 궁성지와 주산성, 망산성, 본관리 산성과 본관리 옥산성, 내곡리 산성 등 6개소로 가장 많다. 그리고 성산면에는 풍곡산성무계리 산성, 봉화산성 등 3개소, 운수면에는 의봉산성운라산성, 우곡면에는 도진리 산성소학산성, 쌍림면미숭산성만대산성 등 각각 2개소에 분포하고 있다.

산성의 규모는 정확하지 않으나 둘레가 500~2,000m 정도로 중소형의 것이 대부분이다. 다만 봉화산성, 월성리 토성, 본관리 옥산성은 둘레가 300m 미만의 소규모의 보루성이나 관망대의 역할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봉화산은 그 중앙부에 대가야시대 이후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봉수가 설치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산성의 형식은 한 개의 산봉우리를 둘러싼 테뫼식 산성이 대부분을 이루며, 주산성 등 일부 산성은 내성과 외성을 갖춘 경우도 확인된다. 산성을 축성한 재질은 대부분이 석성으로 축성 방식은 토석 혼축이 많다. 현재 대부분 무너져 있어 완전한 형태를 갖춘 것은 거의 드문 실정이다.

최근 고령 지역을 중심으로 한 대가야시대 산성의 특징을 신라와 비교하여 정리되기도 하였다. 이에 따르면 대가야의 산성은 소규모의 테뫼식 산성으로 토석 혼축으로 축성되었으며, 현재 대부분이 무너져 있는 상태이다. 그리고 산성 내부에는 집수 시설이 희박한 편이며, 건물지로 사용되었을 법한 평탄지가 확인된다. 산성 주변으로는 대가야시대의 토기가 광범위하게 분포하고 있으며, 산성 인근에는 대가야시대의 고분군이 분포하여 서로 조합을 이루고 있는 경우가 많다.

대가야가 산성을 축성하게 되는 배경은 국가의 자체적인 성장이 중요한 요인이겠지만, 한편으로는 신라와 백제의 압박과 그들과의 대립 관계 속에서 축성이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비교적 규모가 크거나 정연한 성곽이 많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비록 소규모라 하더라도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산성을 축성하고 산 능선을 통해 서로 연결시킴으로써 방어 체계를 구축해 나갔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특징은 대가야의 도읍이었던 고령 지역에서 더욱 잘 나타난다고 하겠다.

다음으로 고령 지역 산성의 특징은 인근의 고분군과 서로 조합 관계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주산성고령 지산동 고분군과 조합을 이루고 있으며, 망산성장기리 고분군, 무계리 산성박곡리 고분군, 본관리 산성본관동 고분군, 운라산성월산리 고분군, 예리산성예리 고분군, 노고산성백리 고분군, 도진리 산성도진리 고분군 등과 능선을 두고 서로 연결되어 있거나 인근에 위치하고 있다. 이 점은 산성과 조합 관계를 이루는 고분군 조영 세력에 의해 축조되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대가야의 도성 방어 체계]

대가야가 백제나 신라 등의 외부 세력을 막아 내기 위해 가장 심혈을 기울인 것은 도성의 방어 체계였을 것이다. 따라서 고령 지역의 성곽, 특히 산성을 중심으로 하는 산성 방어 체계는 곧 도성 방어망으로서 기능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현재까지 조사된 고령 지역의 18개의 성곽을 중심으로 대가야의 방어 체제를 살펴보면 크게 5개의 방어망이 구축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도성과 배후 성, 낙동강 방어선, 대가천 방어선, 회천 방어선 및 외곽 방어선 등의 방어 체계가 갖추어져 있었다. 이 중 외곽 방어선으로는 낙동강, 대가천, 회천 방면 등 3개 방면이 크게 중시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첫째, 대가야의 왕성은 평지성으로 축조된 대가야 궁성지, 그 배후 성으로 주산 정상부에 축조된 주산성이 짝을 이루고 있다. 대가야의 국왕과 왕족, 귀족들은 평소에 왕성에서 머물다가 유사시에는 주산성으로 피난하여 외적에 대항하였다. 이렇게 대피 성의 역할을 했던 주산성과 평시의 집무처인 궁성은 대가야 최후의 방어 체계라고 할 수 있다. 이 점은 대가야의 멸망 당시 신라군이 왕성의 출입문인 전단문에 백기를 꽂자 성 안 사람들이 두려워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결국 항복하고 말았다는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둘째, 대구[화원]-다산면-성산면-대가야읍으로 이어지는 대가야 도성 동쪽의 낙동강 방면 방어망이다. 현재 대가야읍에서 낙동강을 건너 대구 지역으로 들어가는 가장 가까운 통로가 성산면 지역을 경유하는 것이다. 현재 국도 26호선이 개설되어 있는 통로이다. 이 때문에 성산면 무계리무계리 산성, 강정리의 봉화산성이 낙동강 변에 축조되어 있다. 그 배후에는 운수면 신간리의봉산성이 위치한다.

성산면에서 대가야읍으로 들어오는 통로에는 망산성이 축조되어 있고 그 보루성의 역할을 한 것이 풍곡산성이다. 따라서 이 낙동강 방면의 방어를 위해 다산면월성리 토성, 성산면무계리 산성과 봉화산성-의봉산성-풍곡산성-망산성으로 산성 방어망이 구축되어 있다. 특히 낙동강 방어망의 전초성의 역할을 한 것은 무계리 산성이고 최종 방어성은 망산성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망산성은 바로 주산성과 대응하게 되어 있다.

셋째, 성주-운수-대가야읍으로 이어지는 대가야 도성 북쪽의 대가천 방면 방어망이다. 현재 대가야읍에서 성주군의 수륜면 쪽으로 연결되는 통로가 대가천을 따라 국도 33호선이 개설되어 있다. 이 때문에 덕곡면 노리노고산성예리예리산성, 운수면 월산리운라산성, 대가야읍 본관리본관리 산성과 본관리 옥산성 등이 축조되어 있다. 가야산에서 발원한 지맥을 따라 성주군 수륜면 백운리의 가야산성-노고산성-예리산성-운라산성-본관리 옥산성-본관리 본관리 옥산성 등으로 산성 방어망이 구축되어 있다. 가야산성은 성주군에 위치하고 있지만 대가야대가천 방어선의 전초 성의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이며, 운라산성본관리 산성대가천 양측에 대응하면서 최종 방어 성의 역할을 하면서 주산성과 연결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넷째, 낙동강-우곡·도진-대가야읍으로 이어지는 대가야 도성 남동쪽의 회천 방면 방어망이다. 회천은 성주 방면의 대가천과 합천 방면의 안림천대가야읍에서 합수하여 낙동강으로 유입되는 낙동강의 지류이다. 이 통로는 현재 대가야읍에서 회천-낙동강을 따라 남해안의 부산으로 직접 연결되는 수로 교통망이다. 그 때문에 개진면 개포리는 대가야시대의 낙동강의 주요 포구로 기능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 통로에는 우곡면 대곡리소학산성, 도진리도진리 산성, 내곡리내곡리 산성 등이 축조되어 있다. 즉, 소학산성-도진리 산성-내곡리 산성 등 산성 방어망으로 구축되어 있다. 이 중 도진리 산성이 중시되었으며, 내곡리 산성주산성과 대응했던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으로 합천 방면을 방어하기 위한 외곽 방어선이 마련되어 있었다. 이에 속하는 것이 미숭산성만대산성이다. 미숭산성가야산-미숭산-주산으로 연결되는 산 능선을 통해 주산성과 연결되고 있어, 주산성의 배후 성으로서 역할을 수행했을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이상의 산성 방어 체계를 통해 대가야낙동강, 회천, 대가천 방면으로 산성 방어망을 구축하고 있었다. 이는 대가야가 북쪽과 동쪽, 동남쪽 방면의 낙동강 동안의 신라와 대응하면서 산성을 축조하면서 신라와 대치 전선을 형성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따라서 이들 산성이 기능하던 시기의 대가야와 신라의 국경선은 대가천낙동강 방어선이었을 것이다. 반면, 서쪽 방면의 합천 쪽으로는 산성을 거의 축조하지 않았다. 이는 대가야가 합천 지역을 경유하여 전라도 지역까지 진출했기 때문에 특별히 이 방면에 산성을 축조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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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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