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9004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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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六二五戰爭 |
영어의미역 | The Korean War |
이칭/별칭 | 한국전쟁,한국동란,6·25사변,6·25동란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북도 고령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일수 |
[정의]
1950~1953년 경상북도 고령군을 비롯한 한국 전역에서 일어난 전쟁.
[개설]
6·25전쟁은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선제공격에 의해 1953년 7월 27일 휴전 성립까지 3년 1개월 동안 수백만의 인명이 희생되고 셀 수 없을 정도의 물적 기반이 파괴된 전쟁이다. 전쟁은 민족 간 전쟁의 성격으로 진행되었으나, 이후 유엔 연합군과 중국군이 참전하였다는 점에서 국제전으로서의 성격도 띤다.
전쟁의 명칭은 남한에서는 민족 간에 벌어진 전쟁이라는 점에서 ‘6·25동란’ 또는 ‘6·25사변’으로 불렸으나, 최근에는 ‘동란’ 또는 ‘사변’이라는 용어보다 6·25전쟁 또는 한국전쟁으로 많이 부른다. 일본에서는 대체로 ‘조선전쟁’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은데, 이때의 조선은 북한이 아닌 남북한 전체를 지칭하는 용어이다. 북한에서는 혁명적 관점에서 조국해방전쟁이라 부르고 있다.
전쟁 발발 당시 남북한의 전투력을 비교해 보면, 지상군의 경우 국군은 9만 6,000여 명, 북한군은 19만 6,000여 명이었고, 해군은 국군과 북한군이 각각 7,000여 명과 4,700여 명이었으며, 공군은 국군과 북한군이 각각 1,900여 명과 2,000명 정도였다. 전체 병력은 국군은 10만 5,000여 명, 북한군은 20만 3,000여 명으로 국군은 북한군에 비해 절반 정도였다.
[역사적 배경]
일제의 패망으로 우리 민족은 해방을 맞이하여 자주적 민족 국가의 수립을 추구하였으나 북한과 남한에 미소 군정이 설치되면서 분단된 상황을 겪게 되었다. 그 후 국가 수립을 위한 노력에도 남북한으로 분단되고 말았다. 한반도의 분단에는 냉전이라는 국제적 이념적 대립과 갈등이 주요한 배경이 되었다.
[목적]
국내적 분단의 상황과 세계적 냉전의 구도에서 남북한은 서로 대립 관계를 형성하였다. 그 가운데 북한이 ‘조국 해방’이라는 미명 아래 6월 15일을 기해 군사적 공격을 감행하였다. 이것은 평화가 아닌 전쟁을 통한 무력적 방법이었다.
[경과]
북한군이 총공격하여 개전 4일 만인 6월 28일 서울을 점령하고, 계속 남진하여 8~9월 경주·영천·대구·창녕·마산 등 경상도의 일부만을 제외한 전 국토를 점령한 시기이다. 6월 28일 국군은 3개 혼성 사단을 편성하고, 한강 남쪽에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해 7월 4일까지 북한군 남진을 막아냈다. 곧 북한의 선제공격에 수도 서울을 점령당한 남한 정부는 ‘단기적인 패배, 장기적인 승리’, ‘전투의 패배, 전쟁의 승리’를 재빠르게 모색하는 등 모든 대응책을 강구하였다.
이때 미국은 6·25전쟁에 대한 개입을 사실상 결정하고, 38선 이남에 대한 해군·공군 참전[38선 이북에 대한 해군과 공군 작전권 허용] 지상군 파견 등 개입 범위의 확대를 신속하게 결정해 나갔다. 다만, 미국은 단독 개입보다 유엔의 추인과 유엔 회원국의 참전을 이끌어 내어 국제적 명분을 확보하면서 개입하였다. 미국은 유엔군의 지휘권을 확보하여 개입하였고, 유엔군의 구성에서도 지상군의 88퍼센트, 공군의 98퍼센트, 해군의 84퍼센트를 차지할 만큼 전쟁의 중요 당사자로 떠올랐다. 미국은 6월 28일 맥아더 전투사령부를 한국에 설치하고, 7월 5일 미군 1개 대대[일명 스미스 기동 부대]와 포병대를 신속히 파견하였다.
7월 7일 유엔군 사령부 설치에 따라 일본에 있던 도쿄의 맥아더 장군이 유엔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 7월 9일 대구에 미8군사령부가 설치되었으며, 맥아더는 워커 장군을 주한 유엔군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남한 정부도 작전권을 미군에 이양하였고, 7월 14일부터는 유엔군에 편입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6·25전쟁은 민족 내전에서 국제전으로 성격이 바뀌게 되었다.
1950년 8월 1일부터 국군과 유엔군은 낙동강 방어선[Walker Line]을 구축하고, 북한군의 대공세를 막아내고 있었다. 공산군 제4사단은 전라북도 진안군과 장수군, 경상남도 합천군 방면으로 침투해 8월 2일에는 고령군을 공격하였다. 이에 정부 관련 군 당국은 미군 부대와 함께 낙동강 철교가 있는 성산 방면으로 이동하여 다리를 건너 대구로 피난하였다. 군민들은 개진면을 우회하여 낙동강 철교로 이동하였으나 미군에 의해 이미 철교가 폭파된 뒤였기에 위험을 무릅쓰고 도강에 성공한 일부 사람을 제외하곤 다시 고향으로 돌아 왔다.
공산군은 고령군에 인민위원회를 설치하고, 청·장년들로 구성된 자치대를 조직하였다. 미군은 공산군이 점령하고 있는 고령군에 공군기를 이용하여 폭격을 계속하였고, 이 과정에서 고령면[현 대가야읍]의 시가지가 초토화되었다.
[결과]
6·25전쟁 중 고령군은 1950년 8월 초부터 9월 말까지 약 2개월간 공산군의 점령 아래 놓여 있었다. 그동안 고령군은 시가지가 크게 파괴되는 등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6·25전쟁은 3년 1개월 동안 계속되어 쌍방에서 약 150만 명의 사망자와 360만 명의 부상자를 내면서 한반도 전체가 초토화되었지만, 결국 분단국가 사이의 국경선인 38선을 휴전선으로 대체한 채 휴전되고 말았다.
[의의와 평가]
6·25전쟁 결과, 남한은 38선 이북 지역이던 철원·화천·간성 일대와 서해 5도를 차지한 반면, 북한은 38선 이남의 옹진반도와 개성·사천 일원을 차지하였다. 그 결과 휴전선이라 부르는 비무장 지대가 임진강-철원-거진 북방에 설정되었다. 그리고 6·25전쟁은 한반도에서 남북 간의 분단을 고착화하고, 세계적으로는 동서 냉전가 격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6·25전쟁은 전쟁이 아닌 평화의 중요성이 크게 인식되는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