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900409 |
---|---|
한자 | 現代 |
영어의미역 | Present Age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북도 고령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일수 |
[정의]
1945년 8월 15일 이후 경상북도 고령 지역의 역사.
[개설]
현대라 함은 역사학의 시대 구분 가운데 사상(思想)이나 그 밖의 것이 현재와 같다고 생각되는 때부터 지금까지의 시기를 말한다. 한국에서는 1945년 해방 이후부터 현재까지를, 동양사에서는 1911년 신해혁명(辛亥革命) 이후부터 현재까지를, 서양사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 종결 이후부터 현재까지를 현대라고 말한다.
고령군은 옛 대가야가 자리 잡고 있던 땅이다. 대가야는 1400년 전쯤에 사라졌지만 그 서울이었던 지금의 대가야읍을 중심으로 한 고령군 일대를 비롯하여 경상남도 합천의 가야면·야로면과 거창군의 일부 지역에는 그 시대의 유적과 전설이 많이 남아 있다. 서북쪽의 가야산에서 동남쪽으로 뻗어 내린 산줄기가 고령군의 서쪽에서 높이 784m인 미숭산을 이루고, 그 곁줄기 하나가 동쪽으로 뻗어 대가야읍 지산리에서 높이 311m인 주산을 이룬다. 고령군은 서쪽과 남쪽이 험한 산줄기로 이어져 있고, 동쪽은 낙동강으로 빗장이 질러져 있어 천연의 요새가 된다.
1895년(고종 32)에는 지방 관제를 개정하면서 고령현(高靈縣)을 고령군(高靈郡)으로 개칭하게 되었고, 1906년(고종 43)에 이르러서는 성주군(星州郡)의 9방과 현풍군(玄風郡)의 3방을 고령 지역 행정 구역으로 흡수하여 총 26개 방이 되었다. 이후 1914년에 행정 구역상 군·면의 통폐합에 따라 9면으로 개편되면서 지금의 틀이 정해졌다. 1930년에는 쌍동면(雙洞面)과 임천면(林泉面)을 병합하여 쌍림면(雙林面)이 되어 고령 지역이 관할하는 지역은 총 8개 면이 되었다. 1979년에는 고령면이 읍으로 승격되어 1읍 7면의 행정 구역을 갖추었고, 2015년에는 고령읍이 대가야읍으로 개칭되었다.
[해방~1960년대]
1945년 8월 15일, 일본 제국주의가 패망하면서 우리 민족은 해방을 맞이하였다. 고령군에서도 해방의 기쁨을 누리면서 새로운 국가 건설에 노력을 기울였다. 8·15 직후 고령군에서는 치안을 유지하기 위한 고령치안유지대가 조직되고, 국가 건설을 위한 건국준비위원회가 결성되었다. 건국준비위원회는 이후 고령군 인민위원회로 전환되고, 여기에 많은 인사들이 참여하였다. 그러나 미군정의 실시와 모스크바삼상회의 결과에도 불구하고 고령군에서는 좌우익이 연합 전선을 형성했으나 1946년 대구에서 발생한 10·1항쟁으로 인해 혼란을 겪었다.
1948년 한국 문제가 UN으로 이관되면서 정부 수립을 위한 총선거가 실시되어 김상덕이 제헌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그 후 1950년 6·25전쟁이 발생하여 고령군에도 8월부터 두 달 간 북한 공산군이 점령하게 되었다.
고령군은 1959년에 기록적인 사라호 태풍의 피해를 입었다. 1959년 9월 17일에 발생한 사라호 태풍은 우리나라 남동해안 전역을 강타하여 엄청난 피해를 입혔다. 사라호는 9월 17일 낮에 경상남도 통영에 상륙하여 포항을 지나 동해로 빠져 나갔는데, 남해안과 영남 지방에서 결실기에 접어든 농산물을 비롯한 가옥과 농지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고령군에서는 대가천과 회천 및 낙동강이 범람하여 개진면·우곡면 등 연안 지역이 침수되었고, 고령교 주변의 낙동강은 다산면·성산면 일대의 농지를 삼켜 이 일대를 황토 바다로 바꿔 놓았다. 그러나 다행히 고령군은 전체 사라호의 엄청난 피해에 비해 전답 침수 이외에 인명 피해가 없었고, 건물 피해만 10여 건에 그쳤다.
[1970년대~현재]
1968년에 73,095명이었던 고령군의 인구는 1980년에는 48,961명이 되었다. 1979년에는 전체 10,929가구의 82%인 8,967가구가 농사를 지었다. 대구의 근교 농촌 지역으로서 원예 작물을 재배하여 소득을 올리고 있는 고령군은 1984년 88올림픽고속도로가 완공되면서 대도시와 더욱 가까워졌다. 1988년 6월 쌍림농공단지를 조성하였고, 1990년 6월 고령에서 처음으로 다산지방산업단지가 지정되었다.
1990년대부터는 지방화시대가 시작되면서 1991년 3월에 고령군 초대 군의원 선거가 실시되었고, 1995년 6월에는 고령군 초대 민선 군수 선거가 실시되었다. 지방자치시대의 전개와 더불어 고령군은 1990년대 이후 시가지 및 도로 정비가 급속히 이루어지면서 대도시 근교 농촌으로서 성장하였다.
또한 고령군은 공업단지와 산업단지의 조성을 추진하였다. 고령은 지역적으로 대구에 인접해 있어 대구권의 산업기지와 연계하기 용이한 지리적 여건이었다. 고령에는 2005년 12월 말 현재 농공단지로 쌍림농공단지[34개 업체 조업]와 개진농공단지[38개 업체 조업] 2개가 있으며, 지방 공단으로는 다산지방산업단지와 개진지방산업단지 2개 등 모두 4개의 산업단지가 가동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