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90039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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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高靈靑年會 |
영어의미역 | Goryeong Youth Association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경상북도 고령군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권대웅 |
성격 | 사회운동단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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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립연도/일시 | 1920년 7월 3일 |
해체연도/일시 | 1926년 4월 9일 고령청년연맹으로 조직이 개편됨 |
설립자 | 고령군 청년유지 |
[정의]
일제 강점기 경상북도 고령에서 결성된 청년 단체.
[설립목적]
고령청년회는 회원 상호간의 친목 도모와 지식 개발 및 민중 계몽을 위해 조직되었다.
[변천]
고령청년회는 1920년 7월 3일 유우식(兪佑植)·이상봉(李相鳳)·이정근(李正根)·김종기(金鍾基) 등의 발기로 창립되었으며 당시 임원으로는 회장 김구현(金龜鉉)·부회장 박지화(朴芝華)·총무 이정근 등 고령 지역의 유지와 청년 지식인들이었다. 1923년 청년회가 침체하는 상황에서 청년 운동의 방향이 문화 계몽 운동에서 사회주의 노선으로 전환하게 됨에 따라 고령청년회도 능동적인 변화를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1925년 집행 위원제로 체제를 개편하여 사회주의적 청년 단체로 전환했는데, 10월 14일 개최된 제4회 집행 위원회에서 집행 위원장 유용목(兪龍穆), 서무부 유봉완(兪鳳完)·이정규(李正圭)·유일(兪逸), 교육부 정이환(鄭二桓)·이원용(李元龍)·곽수빈(郭守斌), 조사부 강운(姜芸)·김성문(金星汶)·이종국(李鍾國), 사회부 김종기·정운휘(鄭雲徽)·이경호(李暻浩), 체육부 이상준(李尙俊)·송삼룡(宋三龍)·박장오(朴章悟), 소년부 정춘택(鄭春澤)·백남주(白南柱), 검사위원 이정근·유우식·이상봉, 지방 위원 이정욱(李正郁)·정재옥(鄭在玉) 등으로 임원진이 개편되었다.
한편 각 면 단위로 지회가 설치되었으며 당시 활발하게 활동한 지회는 고령청년회 개포지회[1925. 11. 11]·안림지회[1925. 12. 27]·다산지회[1926. 1. 6] 등이었다. 이후 이들 지회는 개포청년회[1926. 3. 2]·안림청년회[1926. 1. 4]·다산청년회[1926. 3. 5]로 개편되었으며 1927년 4월에는 덕곡청년회가 창립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1926년 3월 27일 고령 지역 각 청년 운동 단체를 아우르는 고령청년연맹이 결성되면서 그 하부 조직으로 재편성되었다.
[주요사업과 업무]
노동 야학을 통한 문맹퇴치운동, 물산장려운동, 민립대학설립운동 등의 문화 운동과 토론회, 강연회 등의 개최를 통한 실력 양성 운동과 관련된 사업과 업무를 수행하였다.
[활동사항]
고령청년회는 1920년 11월 학령 아동의 구제와 문맹 퇴치를 위한 노동 야학과 공립학교 부설 강습소를 설립하였다. 노동 야학의 교과목은 한글·한문·일어·산술 등이었고, 교사는 이상봉·이정근·유우식 등 청년 회원을 비롯하여 공립보통학교 교사 김명덕(金明德)·노정용(盧靜容) 등이었다. 강습소의 지식 보급 노력으로 일본인 경찰서장 요시무라[吉村登]도 강습소 신축을 위한 의연금 모집에 동참하였고, 주민들과 각종 단체 등도 야학이나 강습소의 설립·운영에 적극 동참하였다.
그 결과 우곡면 객기동교회 장로 홍재우·구성서(具聖書) 등이 야학강습소를 설립하였고, 고령면 내 기독교회의 가정부인을 대상으로 한 여자야학도 설립되어 운영되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유도진흥회 고령지부가 각 면 단위로 학원을 설립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야학 활동은 봉건 제도의 폐습과 문맹을 타파하고 농촌 청년의 계급적 현실을 일깨워주는 것으로 목적을 삼았다.
고령청년회는 창립 이래 매월 두 차례 이상 토론회와 강연회를 개최하였다. 토론회와 강연회는 시대의 변화에 부응하는 계몽을 목적으로 유학생 학우회나 각지 청년 단체의 연사를 초빙하여 개최하였다. 1924년 4월 대구청년회·현풍청년회·합천청년회·초계청년회·해인청년회 등과 연합 대강연회를 개최하는 등 타 지역 청년회와의 유대관계를 도모하기도 하였다.
고령청년회는 1922년 11월 민립대학설립운동이 전개되자 의연금을 모집하는 등 적극 동참하였고, 1920년 8월 평양에서 처음 시작되어 전국적으로 전개된 조선물산장려운동에 부응하여 금주 단연을 결의하는 등 실력 양성 운동에도 적극 호응하였다. 그 외 신간회 고령지회의 설립도 주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