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90038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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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牛谷面三-一萬歲示威 |
영어의미역 | Independence Movement in Ugonk-myeon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북도 고령군 우곡면 도진리|대곡리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일수 |
[정의]
1919년 4월 초순 경상북도 고령군 우곡면에서 일어난 만세 시위.
[역사적 배경]
3·1운동은 국내외의 긴박한 정세에서 발생의 배경을 찾을 수 있다. 1914년 일어난 제1차 세계 대전과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변화된 세계정세는 민족 문제에 대한 자각을 높이고 한반도를 비롯한 피압박 약소민족의 해방을 고무시켰다. 1918년 1월 제1차 세계 대전을 마무리하는 원칙으로 미국 윌슨 대통령이 내걸은 민족 자결 주의도 식민지 피억압 민족에게 독립의 기운을 불어넣었다.
일제는 강제적으로 한국을 식민지로 만든 뒤 ‘군사적 제국주의’ 차원의 폭력성이 내포된 무단 통치를 실시하였다. 일제는 식민지 수탈 구조의 구축 작업을 추진하였는데, 먼저 식민지 조선의 금융 지배를 위해 화폐 정리 사업을 착수하였다. 근대적 운송망의 구축 역시 일제가 일찍부터 착수한 것인데, 경부선 철도의 부설이 그것이다. 이에 고령은 낙동강 수운을 통한 경제 활동에 타격을 입게 되었다.
또 일제는 토지 조사 사업을 실시해 일제 자본의 자유로운 농촌 침투와 그 지배를 실행하였다. 이 과정에서 고령 지역의 많은 토지 소유권이 일제로 바뀌는 결과를 낳음과 동시에 식민지 지주제가 관철되는 계기가 되었다. 일제는 이런 정책의 온전한 수행을 위해 모든 행정력과 경찰력을 동원하였다. 그 과정에서 일제의 폭압성과 강제력이 자행되어 지역민은 수탈과 지배를 받는 고통을 겪게 되었다.
[경과]
3·1운동의 만세 운동이 전국적으로 퍼져나갈 때 고령 지역에서는 3월 하순 두 차례 만세 시위운동이 있었다. 4월 들어서는 고령군 우곡면에서 만세 시위운동이 계획되었다. 우곡면 야정리의 박재필(朴在弼)이 도진리의 박영화(朴英華)와 박차천(朴且千)을 비롯한 농민 30여 명을 규합하여 4월 6일 밤 11시 무렵 만세를 외치며 마을을 돌고 난 뒤 면사무소로 행진을 시도하였다. 다음 날 출동한 일제 경찰에 의해 박재필·박영화·박차천 등이 체포되었다.
4월 8일에는 도진리의 박기태(朴基太)의 집에서 결혼 잔치가 열렸는데, 일제 경찰이 잔치에 참석한 사람들을 면사무소 앞으로 강제 집합시킨 뒤 시국 강연을 하였다. 강연 뒤 박채환(朴採煥)이 귀가하는 동민들에 민족 독립의 당위성을 역설하였다. 그와 동민들 사이에 독립 의지가 확인되자 박채환이 만세를 선창하고 군중이 크게 호응하였다. 그러나 출동한 일경에 의해 군중은 해산되고 박채환은 체포되었다.
도진리 사건을 지켜보고 격분한 박기로(朴基魯)는 우곡면 대곡리에서 한이군(韓二君)·한용발(韓用發)·도말용(都末龍)·박용학(朴龍鶴)·한광룡(韓光龍) 등에게 도진리 상황을 알리고 만세 운동을 권유하였다. 이에 모두 만세 운동을 즉각 벌이기로 하고, 4월 8일 늦은 밤 11시 무렵 동민 50여 명과 함께 체포된 사람의 석방과 독립 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이때 일제 경찰이 출동하여 박기로를 비롯한 시위 중심인물 6명을 체포하였다.
[결과]
우곡면 3·1 만세시위는 박재필·박영화·박차천 등이 구속되었고, 박채환은 징역 1년의 옥고를 치렀다. 또 우곡면의 박기로는 징역 1년, 한이군·한용발·도말용·박용학·한광룡 등은 징역 6개월을 선고받아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의의와 평가]
우곡면 3·1 만세시위는 고령 지역 만세 운동의 정점에 놓여 있는 고령의 대표적 만세 시위운동이었다. 그에 따라 시위의 피해 규모도 가장 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