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90038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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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日帝强占期 |
영어의미역 | Japanese colonial Regime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북도 고령군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일수 |
[정의]
1910년에서 1945년까지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식민 통치 시기 고령 지역의 역사.
[개설]
개항 이래 조선은 근대화를 달성하기 위한 노력을 경주하면서 외세의 침탈을 막는데 힘을 쏟았다. 그러나 러일전쟁 이후 일본의 한반도 침략이 가시화되고 일제에 의해 강제로 을사조약이 체결되면서 한반도는 실질적으로 일본의 식민지가 되어 갔다. 대한제국은 을사조약이 무효임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헤이그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했으나 그 뜻을 달성하지 못했다. 1907년 일제는 이를 핑계로 고종 황제 대신 순종을 황제로 즉위케 하고, 한일신협약을 체결해 차관 정치를 실시하였다. 이후 일제는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하고, 사법권과 함께 한국중앙은행을 장악하였다. 그리하여 형식적으로만 남아 있던 대한제국은 1910년 8월 일제에 강제 병합되어 한반도는 완전한 일제의 식민지가 되었다.
일제는 ‘조선의 일본화’라는 동화주의 원칙에 의거하여 우리 민족의 저항을 최소화하고 제국주의 수탈을 극대화하고자 하였다. 이런 원칙은 조선 통치의 최고 방침에서 제시되었는데, 이 방침의 핵심은 “조선 통치의 근본 방침은 내선 일체화이고, 궁극적 목표는 조선의 시코쿠·규슈화이다.”라는 철저한 동화주의 정책이었다.
일제의 동화주의 정책은 1911년에 발포된 「조선 교육령」에 그대로 드러난다. “충량한 국민을 육성하는 것을 본의로 한다.”는 「조선 교육령」은 이후 세 차례에 걸쳐 개정되었다. 제1차 「조선 교육령」은 일본어 보급을 통한 충량한 신민의 양성과 노동력 착취를 위한 실업학교에 초점을 두었다. 제2차 「조선 교육령」은 문화 통치의 일환으로 일본 학제와 동일하게 개편하여 일본식 교육을 강화하였다. 제3차 「조선 교육령」 및 제4차 「조선 교육령」은 중일전쟁과 2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지는 상황에서 황국 신민화에 의한 전시 동원 체제의 기반이 되었다.
[행정구역 개편]
일제 침략 하 고령 지역은 우선 행정구역이 개편되었다. 1914년 3월 단행된 총독부령 제111호에 따라 고령군은 종래의 26면을 9면 97동으로 개편되었다. 군에는 군수를 두었는데, 군수는 도지사의 지휘 감독을 받아 법령을 집행하고, 관내의 행정 사무를 관리하며 직원을 지휘 감독하였다. 1920년에는 1917년 시행된 면제(面制)가 일부 개편되어 면협의회가 설치되었는데, 면협의회는 형식적인 면의 자문 기관이었다.
[민족 해방 운동]
고령군에서는 일제의 식민 지배에 저항하는 독립운동이 지속적으로 전개되었다. 고령 지역의 독립운동은 한일 병합을 기점으로 병합 이전에는 크게 계몽 운동과 의병 운동이 전개되었고, 병합 이후에는 국내외 무장 투쟁과 연계한 독립운동, 3·1운동, 노동·농민·학생 운동 등 대중 운동과 민족 협동 전선의 형태로 신간회 고령지회가 설립되었다. 또 문화 운동, 독립운동 자금 모집 운동과 임시 정부 지원 활동 등이 전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