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90037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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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高靈郡國債報償會 |
영어의미역 | Association for Redemption of The National Debt Goryeong Branch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경상북도 고령군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권대웅 |
성격 | 국권회복운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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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립연도/일시 | 1907년 3월 13일 |
해체연도/일시 | 1910년 말 |
설립자 | 이규신|이인재|이상희 |
[정의]
1907년부터 1908년까지 경상북도 고령 지역에서 전개된 국채 보상 운동 의연금 모집 기관.
[개설]
국채 보상 운동은 전 국민이 합심하여 일본에 대한 국채 1,300만 원을 갚아 경제적으로 독립하자는 국권 회복 운동으로 1907년 2월에 대구에서 공식화되었다. 1907년 1월 부산상무소[회두: 서상돈]에서 처음 논의되어 1907년 1월 29일 대구관문사 사장 김광제, 부사장 서상돈, 대동광문회 회장 박해령 등 16명이 발기하여 「국채일천삼백만원보상취지서」라는 격문을 발송하였고 이후 전국 각처에서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대한매일신보』·『황성신문』·『제국신문』·『만세보』 등 중앙 민족지들의 적극적인 지원과 함께 대한자강회·신민회·서우학회·한북흥학회 등 계몽 운동 단체들의 적극적인 호응이 있었으며 전국 방방곡곡에서 각계각층의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함으로써 국권 회복을 위한 실력 양성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특히 일반 국민들의 국채 보상 운동 참여는 자발적이고 열성적이어서 1907년 2월 말 서울에서 국채보상기성회가 조직된 것을 비롯하여 전국 각처에서 국채보상기성회·단연회·국채보상동맹·단연동맹 등이 조직되어 단연을 실행하고 의연금을 납부하였다. 뿐만 아니라 여성들도 국채보상기성회·패물폐지부인회·국채보상탈환회 등을 조직하여 패물을 헌납하였고, 심지어 머리카락을 잘라 파는 여학생들도 있었다.
[설립목적]
고령군 국채보상회는 국채 보상을 위해 고령 지역에서 의연금을 모집하기 위해 조직되었다.
[변천]
1907년 3월 13일 조직되었다.
[활동사항]
고령군 국채보상회는 고령 유생 이규신(李奎紳)·이인재(李寅梓)·이상희(李相羲) 등이 발기하였다. 회의 취지를 자세히 설명하는 연설에 이어 이규신이 100원을 먼저 의연하자 군민들이 이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여 순식간에 1,000여 원이, 수일 만에 수천 원이 모였다.
[의의와 평가]
고령군 국채보상회는 고령 군민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함으로써 국권 회복 운동을 대중 운동으로 확산시키는데 기여하였다.